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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SF 연대기 9: 해방 이후 SF에 대한 인식
이지용

2024년 10월 29일 게재

‘한국 SF 연대기’는 격주마다 연재됩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을 맞이하면서 한국 SF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서게 된다. 기나긴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한반도에는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상상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부응하듯 한 작품이 발표되는데, 바로 이봉권의 『방전탑의 비밀』(1949)이다. 이 소설도 사실 저자에 대해 다소 모호한 지점이 있다. 1949년 호남문화사에서 처음 출간된 책에는 저자가 이봉권으로 적혀 있지만, 1961년 아동문화사에서 제목을 바꿔 출간한 『(일정 시의) 비밀의 폭로』를 보면 표지에는 이봉권, 판권지에는 방인근이 저자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주 1) 해당 작품의 원저자가 누구인지는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아서 차후에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차치하고 소설 자체에 접근하면 『방전탑의 비밀』이 가진 매력적인 개성이 드러난다. 소설이 발표된 1949년은 해방 뒤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단 체제가 출현한 직후이자, 아직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식민 지배의 그늘을 걷어내고, 분단이 고착화하기 전에 현재의 상황을 타계할 일말의 희망이 남아 있던 때였다. 이런 점을 반영하듯 소설은 남북통일이 달성되는 단기 428×년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며, 한반도가 아닌 중국 동북 지방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해방 이전인 1944년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물론 일종의 후일담으로 일제강점기를 소환하는 작품들은 많다. 채만식의 「민족의 죄인」이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그 목적이 현실적인 역사의식에서 비롯하지 않고, 단순히 민족 발전의 가능성이 잉태되는 공간으로서 소환된다는 점이 다르다. 『방전탑의 비밀』을 연구한 이경림은 이를 특수하고 예외적인 상황에서 임시적인 정당성을 가지는 행위규범인 권도(權道)로 규정하고, 그것이 이 소설이 가진 묘미라고 설명한다.(주 2) 민족과 역사에 대한 비판 의식보다는 새로 도래한 세계에서 해결해야 할 눈앞의 과제들에 대해 낙관적인 상상을 개진하는 데에 더 가치를 두었다는 것이다.

“과학자는 언제나 미친 사람 같다. 그리고 몽상가다. 그러나 진실로 과학을 애호하며 과학을 탐구하려거든 오로지 몽상가가 되라! 그리고 그 몽상은 반드시 미수한 장래에 실현할 수 있는 꿈일 것이다. 우리 배달민족은 아직도 과학하는 마음이 적다. 과학자로서 과학을 보급시키며 실천하려매 나는 과학 아닌 과학으로써 꿈 얘기를 하련다. 그러나 황당무계한 망상이 아니고 경험과 실천을 통한 과학소설임을 단언한다.”(주 3)

책의 서언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방전탑의 비밀』의 창작 배경은 제법 명확하다. 우선 이 작품이 과학소설이며, 과학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꿈꾸려고 한다는 (구한말 이래 한결같은 SF의) 목적 역시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배경은 비판적으로 반성해야 할 지점이 아닌 극복하고 넘어서야 할 것으로 남는다. 특히 이 소설을 읽고 흥미가 생기고 깨닫는 바가 있다면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해 노력하자는 선언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주장하는 새로운 대한민국은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구습을 과감히 버리고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만방 무비(無比)한 국가”를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그 발달 수준은 일제가 두려워했던 공습이나 원자폭탄의 위협에도 대적할 만한 것이고, 그것이 소설에서 과학기술 발달의 핵심 결과물로 등장하는 ‘방전탑(妨電塔)’인 것이다.(주 4)

도판 1. 『방전탑의 비밀』(1949) 초판본 표지. 출처: 인천문화재단 한국근대문학관.

소설은 낙관적이고 영웅적인 면모를 가진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이 산재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특히 조선과 일제강점기, 그리고 분단 상황의 부정적 면모를 비판하기보다는 그것을 극복하는 도구로서 과학기술의 장점을 부각한다. 이들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으로 여긴 방전탑은 결과적으로 병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역시 구한말부터 SF에 대해 가졌던 인식과 다르지 않다. 다만, 이전에는 그러한 상상이 구현된 텍스트를 번안하여 전달하는 데 그쳤다면, 이제는 스스로 상상하고 소설로 창작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다. 목적은 유사하더라도 단순히 외부의 것을 빌려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창작했다는 것은 그러한 인식의 내재화를 의미하기에 의미가 있다. 물론 미학적이고 구조적인 완성도는 다소 아쉽다. 예컨대 기술적 설명은 자세한 데 비해 그 기술로 얻은 힘이 현실에 미치는 영향이나 변화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SF를 언급할 때 “과학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개연성’(plausibility)을 가지고, ‘있을 법한 속성’(verisimilitude)을 지닌 서사”라는 정의는 중요하고, 그것에 대해서는 『방전탑의 비밀』 서언에서도 밝히고 있는 바다.(주 5) 하지만 나아가 SF는 이를 기반으로 “과학 그 자체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고찰하는 장르 형식이다.(주 6) 이른바 과학기술과 과학적 합리성을 기반으로 하는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이 중요시된다. 이러한 특징이야말로 1818년에 양태된 SF라는 장르 형식이 확장, 발전해 지금에 이른 주요 동력이다. 그렇게 본다면 『방전탑의 비밀』에서 나타나는 해방 이후의 SF에 대한 인식은 다소 아쉬울 수밖에 없다. 이제 막 독립을 이룬, 분단이라는 역사적 굴곡을 맞이한 국가라는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당시 미국은 이른바 황금시대라고 불리는 SF의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장르적 확장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한국에 전해진 또 다른 SF 작품으로 김복순이 번안한 『화성마』(火星魔, 1954)가 있다. 시기적으로 일본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기 때문인지 일본 SF의 선구자라고 불리는 운노 주자(海野十三)의 대표작을 번안하면서도 원저자를 표기하지 않았다. 그러한 이유로 이 소설은 무려 2010년대 중반까지 H. G. 웰스의 『우주전쟁』의 번안본으로 여겨지거나, 김복순의 창작물로 보아 한국전쟁 이전의 창작 SF로 분류되었다.(주 7)

1948년 출간된 운노 주자의 『화성마』는 원래 1939년에서 1940년까지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大阪毎日新聞)과 『도쿄니치니치신문』(東京日日新聞)에 연재된 SF 소설이다. 연재 당시에는 제목이 ‘화성병단’(火星兵団)이었으나, 패전 이후 전쟁을 연상시키는 제목과 본문에 대한 수정이 불가피해져 『화성마』로 바뀌어 출간되었다. 운노 주자는 태평양전쟁 시기 전쟁소설을 주로 창작했지만 탐정 소설부터 스릴러, SF, 미스터리, 스파이 소설까지 두루 창작한 작가였다. 하지만 이 가운데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주로 SF 작품들이다. 특히 SF와 미스터리를 결합한 작품들은 뛰어난 업적으로 평가받아 왔다.(주 8)

실제로 운노 주자는 와세다 대학 전기공학부를 졸업하고 체신성(逓信省)의 전기시험소 연구원으로 일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일찌감치 과학적 소재를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글쓰기에 강점을 보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시대적으로 아직은 과학소설이라는 장르가 성립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대중적 인기를 구가하던 미스터리 장르(정확히 말하면 탐정소설)를 SF적 요소와 결합한 이야기 전개를 보여 준다. 특히 발명품이나 과학적 지식으로 미스터리한 사건을 해결하고, 지구에 혜성이 충돌할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전개는 과학자가 탐정 역할을 수행하는 운노 주자 소설의 특징을 보여 준다.

도판 2. 운노 주자의 『화성마』(1948) 표지. 출처: NDL Digital collection.
도판 3. 김복순의 『화성마』(1954) 표지. 출처: 서울SF아카이브 제공.

김복순은 이러한 『화성마』의 특징을 등장인물이나 지명 변화만을 주면서 그대로 옮겨 왔다. 그렇다면 왜 이 작품을 가지고 왔을까? 물론 이 작품을 옮긴 이유와 과정에 대해서는 지금껏 제대로 밝혀진 바가 없다. 하지만 『방전탑의 비밀』을 통해 살펴본 해방 이후 SF에 대한 인식의 연장선상에 놓고 보면 그 이유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우선 『화성마』도 이전까지 불가능했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과학기술에 대한 설명이 두드러진다. 이는 운노 주자 소설의 특징이기도 한데, 탐정소설에 이러한 요소들을 그대로 적용하여 트릭 등을 지나치게 장황하게 설명하는 바람에 혹평을 듣기도 했다.(주 9) 그렇기 때문에 운노 주자의 작품 중에서도 『화성마』가 가지는 의미가 두드러진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오히려 장황하게 늘어놓는 듯한 과학기술에 대한 설명에 매력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해방에 이어 분단과 전쟁을 겪으면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구체적인 상상력과 희망을 위한 구체적인 정보들이 필요했던 시기에 그것을 충족해 주는 이야기 형식이기도 했을 것이다.

두 번째로는 해방과 전쟁을 겪고 난 이후에 비로소 잉태되기 시작한 대중들의 필요에 부응한 것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 운노 주자는 일본에서 대중적으로 성공한 작가였고, 공식적으로는 배척할지라도 한국의 대중문화는 한국전쟁 이후로도 암암리에 일본의 영향을 받아 왔기 때문이다. 『화성마』에서 원저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방전탑의 비밀』이나 기존 SF 작품처럼 서문이나 다른 기사 등을 통해 작품의 의미를 설명하는 부분이 없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때이지만, 구한말 이래 인식되어 온 계몽의 도구보다는 흥미로운 이야기 자체로서 SF의 가능성과 가치를 판단하고 이 작품을 번안했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지점이다.

물론 해방 이후 SF에 주어진 주된 사명은 『방전탑의 비밀』에서 확인할 수 있듯 황폐화된 세계를 극복하고 민족의 새로운 미래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들은 이후 한국에서의 SF가 어떠한 이미지로 자리하게 되는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특히 해방 이전까지 SF를 통해 보여 준 근대화와 부국강병에 대한 주제 의식들이 다소 막연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독립 국가로서 더욱 주체적이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작품 속에 포섭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모습은 단순히 유토피아를 상상하던 해방 전의 모습들과는 다르게 구체적으로 세계적인 강대국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어엿한 독립국가로서의 면모로 형상화되는 특징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과학기술적 역량임이 명확하게 제시된다. 따라서 이 시기의 작품들에서 주인공 혹은 주요한 조력자로 등장하는 과학자의 존재는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특징들로 인해 SF는 여전히 도구적이고 목적 지향적인 형태로 창작, 소비되는 경향이 주를 이루게 된다. 물론 시대 상황으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겠지만, 이러한 기조들이 계속되면서 장르의 본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대중문화로서 SF의 발달은 또다시 지연되게 된다. 해방과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겪은 한국은 곧 냉전 체제라는 전 세계적인 거대한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1. 이봉권, 『방전탑의 비밀』(서울: 홍시, 2019), 일러두기 참조.

2. 이경림, 「탈식민의 장르적 상상력: 『방전탑의 비밀』(1949)」, 『만주연구』 33(2022): 216 참조.

3. 이봉권, 『방전탑의 비밀』, 서언.

4. 같은 곳.

5. 이지용, 「한국 SF 서사와 문화사회학」, 『비교문화연구』 55호(2019): 3.

6. 고장원, 『세계과학소설사』(서울: 채륜, 2008), 137.

7. 2016년경 서울 SF 아카이브의 박상준 대표가 단국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김복순의 『화성마』에 대한 본문 확인을 필자에게 의뢰하면서 원본 대조 작업이 진행되었고, 이후 운노 주자의 『화성병단』 및 『화성마』와 본문 대조를 통해 해당 소설이 번안본임이 확인되었다.

8. 権田萬治, 「秘められた科学恐怖の夢─海野十三論」, 『日本探偵作家論』(双葉社, 1996), 188.

9. 若竹七海, 「「シュピオ」の光と翳」, 『「シュピオ」 傑作選』, ミステリー文学資料館 編(光文社, 2000).

이지용
문화 평론가, SF 연구자. 『한국 SF의 스토리텔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단국대학교 인문사회 융합인재양성 사업단의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표 저서로 『한국 SF 장르의 형성』이, 공저로는 『비주류 선언』, 『SF 프리즘』, 『인공지능이 사회를 만나면』, 『인류세 윤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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