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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에서 듣는 음악 2: 전주곡을 위한 전주곡
김선오

2025년 7월 1일 게재

『비행기에서 듣는 음악』의 일부를 연재합니다. 매주 화요일, 다섯 번의 연재 이후 단행본이 출간될 예정입니다.

그림: 노상호

조성진
2015년 제17회 쇼팽콩쿠르 우승 실황 앨범
도이체 그라모폰
2015년

자크 데리다는 『산종』(Dissemination)에서 서문이 지닌 시간적, 공간적 모순을 지적한다. 그는 서문이 독자에게 이제부터 읽게 될 텍스트를 소개하는 동시에 이미 완성된 텍스트에 대한 후속적 설명이라는 이중적 역할을 수행한다고 말한다. 서문은 텍스트의 내부와 외부를 동시에 점유하는 경계적 공간이며 텍스트의 일부이면서도 그 밖에 존재하기 때문에 텍스트를 구성하는 동시에 해체하는 양방향의 힘을 지닌다.

「쇼팽 프렐류드 1번 C장조 작품 번호 28」은 스물네 곡의 쇼팽 프렐류드 중 첫 번째 곡이며 30초 정도로 길이가 짧다. 어느 날의 일기에 이 곡에 대해 “읽어도 읽어도 닳지 않는 두 줄짜리 시 같다”고 쓴 적 있는데(이 곡은 2021년 애플뮤직에서 내가 가장 많이 재생한 곡이다) 서문에 관한 데리다의 글을 읽고 보니 이 짧은 곡이 앞으로 연주될 전주곡들을 품고 있는 것 같고, 그런 의미에서 시보다 서문과 더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쇼팽 프렐류드 1번 C장조 작품 번호 28」은 그러니까 전주곡을 위한 전주곡이고, 서문으로만 이루어진 책이 있다면 그 책의 서문 역할을 하는 글과 같다. 첫 음이 들리는 순간 책의 첫 페이지가 펼쳐지듯 음악이 열린다. 지상에서 발생한 열림의 움직임을 모두 수집하여 음악으로 만든다면 바로 이 곡처럼 들릴 것이다.

피아노 선생님은 레슨 중에 나에게 손목을 달라고 했다. 오른손을 내밀자 내 왼손을 오른쪽 손목 위로 가져갔다. 검지의 피부로 내 몸의 맥박이 느껴졌다. 선생님은 피아노는 맥박처럼 쳐야 한다고, 일정하되 기계적이지 않은 리듬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의 아름다움에 혼미해져서 쳐야 할 부분을 잠시 잊었던 것 같다. 피아노를 배우면서 가장 어려웠던 건 메트로놈에 맞추어 연습하는 일이었다. 메트로놈 소리를 들으면 음악을 놓쳤고 연주에 집중하다 보면 메트로놈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메트로놈 연습이 왜 이렇게 어려울까 고민해 본 결과 첫째는 나의 박자 감각이 매우 떨어지기 때문이고, 둘째는 내가 음악을 지나치게 문장처럼 생각하고 있어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피아노를 말하듯 연주하려 했던 것이다. 누구도 메트로놈에 맞추어 대화할 수는 없음에도…. 쇼팽 프렐류드를 비롯하여 조성진의 피아노 연주는 나에게 자주 말처럼 들린다. 뜻 없이 이어지는 말들, 말해지지 않은 말들, 기억 속에 잔향으로 남아 있는 중첩된 말들.

김선오

시인. 199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과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한다. 시집 『나이트 사커』 『세트장』 『싱코페이션』, 산문집 『미지를 위한 루바토』 『시차 노트』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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