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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볼』 역자 후기
양두원

2025년 3월 18일 게재

출처: 가와니시 레이코, 『플레이볼: 조선·타이완·만주에서 꽃핀 야구 소년들의 꿈』, 양두원 옮김(워크룸 프레스, 2017), 361–366.

2017년 8월, 고시엔 구장은 한여름의 태양만큼 뜨겁게 불타올랐다. 그중 16강전은 명성이나 내용 면에서 매우 극적인 경기였다. 오랜 고시엔 역사에서 단 일곱 차례밖에 없었던 춘하연패를 달성했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한 학교에서 두 번째 춘하연패를 노리는 ‘고교 야구의 끝판왕’ 오사카 토인 고교, 그리고 미야기현의 강자이자 100년 고시엔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도호쿠 지방 여섯 현의 우승 염원을 등에 진 센다이 이쿠에이 고교가 맞붙었다. 우승 후보 간의 경기라는 평대로 후반까지 팽팽한 접전이 이어졌다. 선취점을 얻은 오사카 토인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던 경기는 9회 말 투아웃에서 거짓말 같은 끝내기 안타로 센다이 이쿠에이 고교가 승리했다. 재학생들과 지역에서 올라온 학부모, 주민들로 가득한 알프스 스탠드에는 희비가 교차하고 경기를 중계하는 캐스터의 목소리도 한껏 흥분한 듯했다. 약자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에 3루 센다이 측에 앉아 극적인 순간을 만끽하던 역자는 이 한 경기야말로 고시엔의 지난 역사와 매력이 응축된 경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해 고시엔 대회는 99회째를 맞이했다. 하나의 대회가 100년 넘게 지속된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한국에서 이미 인기가 시들해진 고교 야구가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여전히 전국적 인기를 누리는 것을 보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검게 탄 얼굴로 청춘의 한 페이지를 바쳐 야구에 모든 것을 건 소년들은 한 마을의 영웅이자 지역을 대표하는 자랑으로 여겨진다. 경기에서 승리한 이들은 홈플레이트에 나란히 서서 교가를 부르고 패배한 이들은 눈물을 흘리며 고시엔 구장의 검은 흙을 퍼 담아 권토중래의 의기를 보인다. 물론 고시엔에 이런 감동적인 장면만 있지는 않다. 야구 명문 사립학교들은 여전히 다른 지역에서 유망주를 선점해 스카우트하고, 에이스급 선수는 자신의 미래를 송두리째 앗아갈지도 모를 혹사에 시달린다. 몇몇 학교에서는 후배를 하인처럼 부리거나 폭행을 일삼는 일도 있었다. 이런 빛과 그림자를 끌어안은 채 고시엔은 100년을 흘러왔다. 그리고 그 역사의 일부에 조선을 비롯한 식민지 학생들도 있었다.

이 책의 원제는 『전쟁 이전 외지의 고교 야구: 타이완 · 만주 · 조선에서 꽃핀 야구 소년들의 꿈』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태평양전쟁 이전 일본과 식민지 고등학교의 고시엔 역사를 담고 있다. 일본에서 고교 야구사를 다룬 책은 드문 편이 아니다. 일본의 웬만한 서점에는 고교 야구 코너가 따로 갖춰져 있다. 범위 또한 고시엔 통사에서 고교 야구사에 한 획을 그은 학교와 스타들, 소설, 영화, 만화, 명사의 어록, 야구 교육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일본인에게 고교 야구는 청춘의 대명사로 여겨진다. 전국적 관심을 받다가 프로야구 출범 이후 인기를 잃어버린 우리 입장에서는 무척 부러운 부분이다. 아니, 단순히 부럽다고 하기에는 일본 고교야구의 역사는 그 토대가 깊고 넓다. 전래 시점만으로 보자면 한국, 일본, 타이완의 야구는 그렇게 오랜 차이는 나지 않지만, 그 속에 담긴 문화적 차이는 만만찮게 크다. 일본에서는 천황가를 비롯해 사회 전반에 야구 열기가 들끓었고 거기에 일본 특유의 정신주의와 신문사의 상업주의까지 가세하면서 일본만의 독특한 야구가 생겨났다. 일본어 중에는 야구 소년, 그중에서도 특히 고교 야구에 전념하는 소년을 가리키는 ‘규지’(球児)라는 말이 따로 있을 정도다. 야구는 단순한 외래 스포츠이기 이전에 하나의 문화였다. 그런 토대가 있기에 다양한 주제의 책이 쓰일 수 있었을 테다. 일본에서 고시엔사를 다루는 책은 이미 많이 출판됐지만, 이 책은 드물게 당시 식민지의 야구를 중점적으로 다룬다는 면에서 그 의의가 있다. 예컨대, 그동안 타이완 야구는 우리에게 왕젠민, 천웨이인을 비롯해 몇몇 메이저리그 선수를 배출한 것이나,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등의 국제 대회에서 만나는 낯선 대상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이 책을 통해 타이완 야구의 저력이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알 수 있을 테다. 저자 가와니시 레이코는 당대의 다양한 자료를 참고하면서 또 한편, 톈진 중학 야구부원으로 고시엔의 흙을 밟은 선친에 관한 기억을 더해 책을 엮었다. 역사적 무대가 생생한 개인사와 중첩되는 이런 부분은 일반적 야구사 서적에서는 쉽게 볼 수 없기에 한층 더 매력적이다.

특히 한국 독자들은 조선 야구사 부분에 눈이 갈 수밖에 없다. 일제강점기 한국 고교 야구의 역사는 매우 복잡한 문제다. 일본인 학교와 조선인 학교가 얽혀 있었고, 어떤 부분이 일본적이라 해서 일방적으로 배제할 수 없는 부분도 존재한다. 그마저도 아직 충분히 정리되지 못하고 사람들의 관심도 별로 받지 못하고 있다. 일례로 조선 야구사에 관한 최초의 저작인 오시마 가쓰타로의 『조선야구사』는 2016년에야 정식으로 번역됐는데, 매우 이른 시기를 제외하면 일본인이 참가한 팀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고, 일장기 말소 사건의 주역이었던 이길용 기자의 조선 야구사 연재 기사와 한국 야구위원회(KBO)가 발간한 『한국 야구사』나 휘문고, 인천고 등 해방 이전부터 야구 명문으로 이름이 높은 학교 연혁을 통해 단편적으로 접할 수 있을 뿐이다. 저자는 『아사히 신문』에 실린 경기 관전평과 야구 전반에 관한 기사를 통해 당시의 분위기를 충실하게 재현하려 했고, 무엇보다 선수들이 남긴 귀중한 수기를 통해 경기에 참여한 이들의 육성으로 당시 분위기를 전한다. 이는 그간 한국에서 있었던 이전의 연구에 부족한 부분이어서 우리가 참고할 만하다. 반대로 저자는 조선의 야구사를 서술하면서 대부분 일본의 자료에만 의존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한국의 신문이나 잡지를 비롯해 여러 곳에 야구에 관한 자료가 꽤 있었지만,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점은 아쉽다. 이런 부분이 상호 보완되었다면, 해방 이전 한국의 고교 야구사를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데 보다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그런 의미에서 조선 야구사 부분에 원저에는 없는 휘문고보 이야기를 덧붙였다. 휘문고는 지금도 고교 야구의 명문 중의 하나지만 근 100년 전에도 조선을 대표하는 강호였다. 무엇보다 조선인 학생들로만 이뤄진 이 팀이 조선 학생 야구계를 휘어잡고, 고시엔의 무대를 누볐다는 사실이 좀 더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원제 『전쟁 이전 외지의 고교 야구』에서 ‘전쟁’이라는 말을 다시금 곱씹게 된다. ‘외지’라는 말에서 대동아공영권을 꿈꾼 이들의 고약한 냄새를 지울 수는 없지만, 이미 100년 가까운 과거에 야구 하나로 각국의 젊은이가 모여 청춘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바쳤다는 사실만큼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한편, 야구 소년들은 전쟁의 사상자들이기도 했다. 자신의 ‘고향’이 전쟁터가 돼버린 탓에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방학 숙제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먼저 떠오를 정도로 순진했던 소년들에게 전쟁이 남긴 상흔은 깊었다. 일본뿐 아니라 식민지의 수많은 젊은이가 전쟁터로 끌려갔고, 그중에서 가미카제 특공이나 연합군의 공격으로 사망한 이들도 많았다. 그들에게 전범국의 일원으로서 전쟁의 책임을 묻는 일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국적을 불문하고 어린 학생들이 격동의 시대에 무거운 역사의 짐을 온몸으로 짊어져야 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비극이다. 시작에서부터 발전과 중단까지 고교 야구 또한 정치 그리고 시대와 무관할 수 없었다. 특히나 일본을 둘러싼 식민지 학생들의 경우는 더더욱 그랬다. 요컨대, 고교 야구는 당대 동아시아사의 축소판이었다.

한국 독자들이 책을 읽고 불편하게 느낄 부분도 없지 않다. 서문에서 밝힌 대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일본인의 기억에서 잊힌 조선, 타이완, 만주의 고교 야구사를 재구성하는 데 주력했다. 거기서 ‘아시아를 무대로 웅비한 일본인’에 대한 일종의 향수를 숨기지 않는다. 멀지 않은 과거에 다수의 일본인이 ‘활약한 무대’는, 그리고 수기를 남긴 선수들이 그리워한 땅은 그들의 잃어버린 제2의 고향이기 전에 제국주의 일본이 침략으로 얻어낸 엄연한 타국이었다. 저자의 이런 감정 묘사는 비록 제국주의적 우월감은 아닐지라도 조선, 타이완, 만주를 주변으로 보는 일본인 위주의 시각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고 저자가 일방적으로 과거 일본이 식민지에 남긴 수혜적 입장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타이완의 우서 사건이나 조선의 3·1 운동 등의 예에서 볼 수 있듯 당시 일본의 강압적 행태에 대한 지적 또한 잊지 않는다. 독자들이 이런 부분을 헤아려 읽었으면 한다.

양두원
KAIST에서 화학공학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다. 프로야구 원년 MBC 청룡 이래 LG 트윈스의 오랜 팬이다. 2000년대에 들어 응원하는 팀이 암흑기에 빠지자 우울한 마음을 다스리려고 스페인 축구와 고시엔(甲子園, 갑자원)을 파기 시작했다. 2010년 우연히 놀러간 고시엔에서 오키나와 대표 코난 고교의 기념비적 우승을 접한 뒤 본격적으로 팬이 되어 지금은 매년 여름 고시엔 구장에서 경기를 관람하는 게 연례행사가 됐다. 모 방송국에서 카메라 기자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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