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nu

documents
휘문고보, 영광의 나날들
양두원

2025년 2월 11일 게재

출처: 가와니시 레이코, 『플레이볼: 조선·타이완·만주에서 꽃핀 야구 소년들의 꿈』, 양두원 옮김(워크룸 프레스, 2017), 85–92.

1923년은 조선 야구사에서 기념비적인 해였다. 이해에 조선인 학생으로만 구성된 휘문고보가 전국 중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 조선 지역 예선에서 전해의 우승 팀인 경성 중학을 물리치고 본선에 진출했다. 당시에는 조선인 학교가 대회에 참가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화젯거리였다. 일본이 식민지에 참가권을 부여한 1921년 이래 태평양전쟁으로 1940년 대회가 일시 중단되기까지 조선 대표로 참가한 팀 가운데 오롯이 조선인 학생으로만 구성된 팀은 휘문고보가 유일했다. 휘문고보의 승리는 단순히 대회의 우승만이 아니라 차별받던 식민지 민족의 설움을 날려 버린 쾌거였다. 경성 중학 야구부는 서울은 물론 조선 최강으로 불리고, 전원이 일본인 학생으로 구성돼 있었기 때문이다. 경성 중학이라는 학교 자체가 서울에 사는 일본인의 자녀를 위해 만들어진 학교였고, 이곳에 다닐 수 있었던 조선인 학생은 부모가 상류층인 극소수에 불과했다. 야구부도 당연히 일본인 학생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경성 중학은 1922년 제2회 조선 지구 예선에서 우승하며 부산 중학에 이어 두 번째로 본선 무대를 밟은 강팀이었다. 휘문고보가 쟁쟁한 일본인 학교를 연파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미 휘문고보는 같은 해에 열린 전국 조선 소년 야구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바 있으며 모국을 방문한 하와이 원정단에도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본선 진출은 휘문고보 전성시대의 정점이었다.

제4회 전조선 야구 대회에서 우승한 휘문고보. 1923년 5월 19일.

1923년의 전국 중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는 나루오 구장에서 열린 마지막 대회였다. 관중 수용과 안전 문제를 고려해 지금의 효고현 니시노미야시에 고시엔 구장을 신축했는데, 대회는 곧 구장 이름을 따 ‘고시엔’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된다. 마흔일곱 곳의 도도부현에서 마흔일곱 팀이 출전하는 지금과 달리 당시 대회는 몇 권역을 묶어 열아홉 지역으로 나누었고 타이완, 만주와 더불어 조선도 그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했다. 휘문고보는 조선 대표로 당당히 그 자리에 섰다.

휘문은 고시엔에서 1회전을 부전승으로 올라간 뒤 2회전에서 만주의 강호 다롄 상업을 만났다. 선수 전원이 일본인 학생으로 이뤄진 다롄 상업은 태평양전쟁으로 고시엔 대회가 잠정 중단되기까지 본선에 열두 번이나 오른 강팀이었고, 1926년에는 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식민지 대표로 결승에 오른 학교는 1926년의 다롄 상업과 1931년의 자이 농림뿐이었다. 휘문 야구의 주축은 조선 최고의 배터리로 이름 높았던 ‘곰보 투수’ 김종세와 포수 김종식이었다. 조선 지구 예선은 물론 여타 조선 대회에서도 투타에서 맹활약한 김종세와 호타준족을 자랑한 김종식은 휘문의 전성시대를 이끈 주역이었다. 다롄 상업과의 경기에서도 두 선수는 나란히 2안타씩 터뜨리며 공격을 주도했다. 특히 투수 김종세는 삼진 여덟 개를 뽑아내며 9 대 4로 승리를 거두는 데 일등 공신이 됐다. 하지만 공수의 핵이었던 포수 김정식이 경기 도중 부상으로 교체된 것은 팀에 큰 불운이었다. 김정식은 다음 경기에서 벤치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3회전 8강에서 만난 교토 대표 리쓰메이칸 중학과의 경기에서 김종세는 삼진 열 개를 잡아내며 역투했지만, 4 대 4로 팽팽히 맞서던 9회 초에 집중 타를 맞으며 3실점을 하고, 팀은 결국 5 대 7로 패하고 말았다. 포수 김정식의 결장이 패인이라 할 만큼 그의 존재감은 컸다. 8강 진출은 조선 대표가 고시엔에서 거둔 최고의 성적이었다. 식민지의 야구 소년들이 내지에 온다는 사실은 일본인에게도 큰 화제였다. 특히 타이완의 원주민 학생과 조선 학생이 눈길을 끌었는데, 겉모습뿐 아니라 예상 밖의 뛰어난 실력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휘문고보의 강점은 앞서 말한 김종세와 김정식의 배터리에 유격수 정인규, 중견수 이순재로 이어지는 강한 센터라인이었다. 당대 거의 모든 경기를 휩쓴 이들은 뒷날 고려 구락부에 이어 일본의 세미 프로로 스카우트될 만큼 재능이 뛰어났다. 김정식은 뒷날 일본의 세미 프로인 다카라즈카에 진출해 손효준과 함께 활약했다. 안정된 수비에 최고의 배터리가 조합된 휘문고보는 조선 당대 최고의 팀이라 할 만했다.

원래 휘문고보는 명성황후의 외척 민영휘가 사재로 만든 학교였고, 고종은 그의 이름을 따 ‘휘문’이라는 교명을 하사했다. 조선의 몇 안 되는 사학이었던 만큼 휘문을 거친 선생과 학생 가운데 주시경, 최남선, 김두봉, 정지용 등 굵직굵직한 이름을 찾을 수 있다. 또한 단편소설 「가마귀」(1936)로 유명한 소설가 상허 이태준과 조선의 문화재를 지키는 데 큰 역할을 한 간송 전형필, ‘한국의 미켈란젤로’로 불린 화가 이쾌대도 휘문의 야구부원이었다. 특히 전형필은 1924년 야구부 주장을 맡고, 와세다 대학 재학 시절에는 유학생 팀으로 조선에 원정을 오기도 했다. 『한국 야구사』(1999)에 실린 1924년 전국 조선 야구 대회 출전 명단에 7번 타자로 오른 그의 이름을 볼 수 있다.(주 1)

휘문 고보 선수 시절의 이쾌대(오른쪽). 휘문고등학교 제공.
와세대 대학 재학 시절 유학생 팀으로 조선에 원정을 온 무렵의 전형필. 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휘문의 야구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이 또 한 명 있다. 바로 휘문고보 선수를 지도한 코치 박석윤이다. 박석윤은 교토 삼고를 거쳐 도쿄 제국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수재였다. 그는 유학 시절 내내 삼고 야구부에서 좌완 에이스로 활약하고, 라이벌 도쿄 일고와의 시합에서 연승을 거두며 일본 전국에 이름을 알렸다. 도쿄 제국 대학 시절에도 명투수로 활약한 그는 유학생 야구단을 이끌고 조선 원정에 나서기도 했다. 유학생들의 뛰어난 야구 기술과 세련된 유니폼은 장안의 화제였다. 그들은 일본에서 익힌 선진 야구 기술을 조선에 전파한 전령사였다. 박석윤은 도쿄 제국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조선에서 중앙 체육단 주장으로 활약하며 전국 조선 야구 대회 우승을 이끌고, 메이저리그 올스타 팀을 조선으로 초빙해 경기를 치렀다. 당시 일본에서 메이저리그 올스타 팀이 친선 경기를 벌인다는 소식을 들은 박석윤이 일본 유학 시절 맺은 인맥을 활용해 조선 경기를 주선하고, 직접 투수로 나섰다. 하지만 경기 결과는 3 대 23의 대패였다. 흥미롭게도 이날 경기의 출전 명단에는 이듬해에 고시엔 본선에 오른 휘문고보의 포수 김정식과 투수 김종세도 이름을 올렸다. 김정식은 2안타를 기록했는데, 상대는 보스턴 레드삭스 출신으로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명투수 허브 페녹이었다. 뒷날 박석윤은 휘문고보에서 교편을 잡으며 동시에 야구부를 맡았다. 그의 지도로 탄탄한 훈련을 쌓은 휘문고보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시엔 본선에 오른다.

유학생 야구단에서 투수로 활약한 박석윤(1920).
오사카 중학을 격파한 휘문고보(1924). 중앙에 중절모를 쓴 인물이 박석윤, 두 번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간송 전형필이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화려한 야구 인생 이후 박석윤은 일제, 전쟁, 분단 등 엄혹한 시대를 거치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는 뒷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으며 당대 최고의 엘리트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일제하에서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부사장을 지내고, 일본의 괴뢰 정부인 만주국 치하에서 폴란드 총영사까지 올라 대표적 친일 인사로 꼽히기도 한다. 특히 그의 이력에서 조선 공산당이 큰 피해를 본 ‘민생단 사건’에 깊숙이 관여한 사실과 항일 무장 세력에 대한 귀순 공작은 씻을 수 없는 주홍글씨다. 그러면서도 김성수, 송진우, 여운형 등 민족 지도자급 인물들과도 가까이 지내고, 해방된 뒤 건준에서 여운형의 최측근으로 활동한 ‘문제적 인물’이었다. 그의 이런 활동에 미군정이 주목하자 북한으로 피신했는데, 김일성은 자신이 목숨을 잃을 뻔한 민생단 사건을 잊지 않았고, 결국 박석윤은 체포돼 민족 반역자라는 이름으로 처형당하는 비극적 운명을 맞았다.

고시엔 본선에 오르며 전성기를 맞은 휘문고보는 에이스인 김종세가 졸업한 뒤 급격한 하락세를 겪는다. 라이벌인 중앙고보와 ‘홈런왕’ 이영민이 이끄는 배재고보에 맥을 못 추며 이후 몇 년 동안 지지부진한 모습으로 우승권과 거리는 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전성기 멤버인 유재춘, 정인규에 새로운 에이스 이진형이 가세하면서 휘문고보는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전 조선 대회에서는 1926년부터 전무후무한 3년 연속 우승 기록을 남겼다. 주축 멤버들은 졸업한 뒤에도 청년부, 성인부 대회에서 활약하고, 일본에서도 직업 야구 선수로 조선 야구의 힘을 드러냈다. 이렇듯 휘문은 해방 이전의 학생 야구계에서 가장 찬란히 타오른 불꽃이었다.

휘문고보 야구 선수들(1941). 휘문고등학교 제공.


1. 책 222쪽에는 ‘김형필’(金鎣弼)로 표기돼 있는데, ‘전형필’(全鎣弼)의 오기로 보인다.

양두원
KAIST에서 화학공학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다. 프로야구 원년 MBC 청룡 이래 LG 트윈스의 오랜 팬이다. 2000년대에 들어 응원하는 팀이 암흑기에 빠지자 우울한 마음을 다스리려고 스페인 축구와 고시엔(甲子園, 갑자원)을 파기 시작했다. 2010년 우연히 놀러간 고시엔에서 오키나와 대표 코난 고교의 기념비적 우승을 접한 뒤 본격적으로 팬이 되어 지금은 매년 여름 고시엔 구장에서 경기를 관람하는 게 연례행사가 됐다. 모 방송국에서 카메라 기자로 일하고 있다.

related texts

documents
『플레이볼』 역자 후기
documents
조선과 만주에서 퍼져가는 야구 소년들의 꿈 4
documents
조선과 만주에서 퍼져가는 야구 소년들의 꿈 3
documents
조선과 만주에서 퍼져가는 야구 소년들의 꿈 2
documents
조선과 만주에서 퍼져가는 야구 소년들의 꿈 1
documents
『커피 내리며 듣는 음악』, 리필: 지나쳐야 록이다
notice
『라디오 모양의 다리미, 다리미 모양의 주전자, 주전자 모양의 라디오』 출간 기념 토크
documents
한국 SF 연대기 11: 한국 SF 작가 협회와 전집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