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nu

documents
조선과 만주에서 퍼져가는 야구 소년들의 꿈 3
가와니시 레이코

2025년 3월 4일 게재

출처: 가와니시 레이코, 『플레이볼: 조선·타이완·만주에서 꽃핀 야구 소년들의 꿈』, 양두원 옮김(워크룸 프레스, 2017), 83–84, 93–100.

첫 출전 학교가 늘어난 조선 지구 예선

1924년 지구 예선은 지난해 우승 학교인 휘문고보 등 세 학교가 이런저런 이유로 참가하지 못했다.(주 1) 대신 평양 중학과 배재고보가 처음으로 참가했다. 배재고보의 전신은 배재학당이다. 1885년 감리교 선교사가 개교하고, 다음 해에 고종이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조선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으로 불리며 독립운동가 여운형, 초대 대통령 이승만 등의 인물을 배출하기도 했다.

북부에서 참가한 평양고보는 26일 시작하는 지구 대회를 목표로 경의선을 타고 평양을 출발했다. 경의선은 원래 1902년에 한성(지금의 서울)과 개성을 연결하는 선로였다. 2년 뒤 제1차 한일협약에 따라 일본이 러일전쟁의 물자를 운송할 목적으로 중국과 국경을 맞댄 의주까지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인력을 투자해 선로를 만들었다. 뒤에 경부선, 만철선과 연결돼 부산에서 만주까지 대륙 연락 급행열차가 달리게 됐다.

결승전은 경성 중학과 배재고보의 경기로 치러졌다. 지역 신문은 이렇게만 전했다. “배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기권을 자청하고, 주최 측은 시비를 가리지 않고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배재고보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판정을 일본에 유리하게 내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조선인이 배우는 학교의 지구 예선 참가는 주최 측인 오사카 아사히 신문사와 총독부도 ‘내선 융화’ 관점에서 봤다. 탄압 일변도의 무단 통치에서 전환된 문화 정치의 상징으로서도 적절했기 때문이다. 문화 정치로 완전히 바뀌며 확실히 표면상으로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지하에 잠들어 있는 마그마는 이럴 때 벌어진 틈새로 나와 얼굴을 내밀지 않았던가. ‘내선 융화’라고 하는 아름다운 슬로건 속에 감춰진 모순과 기만은 조선이 겉으로 보기에 근대화됐다고 해서, 혹은 일본인이 조선인과 함께 야구를 즐긴다고 지워 없앨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런 굴욕을 상상할 수 있는 일본인은 많지 않았다.

경성 중학은 고시엔 1회전에서 돗토리 중학에 완패했다. 이듬해인 1925년 지구 예선을 앞두고 지역 신문은 한탄했다. “조선 야구계는 5년 동안 일진일퇴였다.” 야구 열기가 높고 참가 학교도 늘었지만, 실력은 그대로였다. “이 원인은 총독부 학무당국이 기존 인습에 사로잡혀 학생들의 학교 대항 경기를 적극적으로 장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진학을 중시한 중등학교에는 야구를 둘러싼 제한이 엄격하고, 사학이나 조선인 학교는 비교적 느슨했다.

이처럼 주최 측인 신문사는 불만으로 가득했다. 그런 상황에도 조선 지구 예선은 순조롭게 발전했다. 하지만 부원 수와 경제적 상황 때문에 해마다 안정적으로 참가할 팀은 아직 많지 않았다. 또한 참가 연령 규정 위반으로 해마다 참가 학교 수는 들쑥날쑥했다. 이해에 처음으로 참가한 학교는 원산 중학과 경성 사범이었다. 사범학교의 참가는 매우 특별한 사건이었다. 지난해 결승에서 중도 기권한 배재고보도 참가했다. 원산은 조선 북부의 항구로, 한일수호조약이 체결됐을 때 개항해 일본인 거류지가 됐다. 1914년에는 경성과의 사이에 철도가 개통되고, 동해의 가장 큰 항만도시로 번성했다. 재일 교포 북송 사업에 쓰인 만경봉호가 원산에서 니가타 사이를 운항했다.

조선 특유의 맑은 날씨에 내리쬐는 태양 아래 열린 개막식에서 시구에 나선 인물은 총독부에서 파격적으로 출세 가도를 달리던 학무국장 이진호였다.(주 2) 결승전에서는 부산 중학이 4 대 2로 경성 중학을 꺾었다. 하지만 응원전이 과열되면서 학생 야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뒷말이 나왔다. 이후에도 응원 자제는 매회 대회 참가 규정으로 강조됐다.

의기양양하게 고시엔의 흙을 밟은 부산 중학은 타이완 대표 타이베이 공업과 맞붙었다. 결과는 6 대 4의 승리였고, 타이완 지역 신문은 「타이베이를 저주하는 비」라는 기사에서 경기 결과를 전했다. 2회전에서는 산요 지방 대표인 야나이 중학에 4 대 3으로 패했다. 하지만 관부연락선을 타고 부산으로 돌아오자 많은 학부모와 학생, 시민의 환영 인파가 이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주장 아사노는 환영 인파 앞에서 소회를 밝혔다. “어쨌든 넓은 고시엔에 수십만의 팬이 운집한 무대에 올랐습니다. 마지막까지 공이 어디로 날아올지 알아차릴 수 없었습니다. 시합 성적은 『아사히 신문』 기사 그대로입니다. 조선에는 시합 수가 적습니다. 커브에 고전하고, 다음에 어떤 공이 올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시합 수가 적은 탓에 상대방의 다양한 구종에 적응하지 못한 분한 마음을 알 수 있다.

열 곳을 넘어선 조선 지구 예선 참가 학교

1926년 조선 지구 예선은 7월 29일부터 경성 그라운드에서 열렸다. 참가 학교는 열 곳을 넘었다. 처음으로 이리 농림, 경신 중학, 대구 상업, 대구 중학이 참가했다. 시구자는 조선군 사령관 모리오카 슈세이였다. 사령관의 시구에 총독부를 비롯해 일부에서 반대론이 일었다. 하지만 군은 협조적이었던 듯하다. 사실 모리오카 사령관이 하려던 개막식 시구는 조선 항공 연구소의 니시오 대위가 공중에서 던질 예정이었는데, 비 때문에 중단됐다. 니시오 대위는 경성 중학과 부산 일상(一商)의 결승전 때 아사히 신문사의 깃발을 비행기 날개에 달고 우선 경성 지국 옥상을 선회 비행한 뒤 경성 그라운드 상공을 한 바퀴 돌며 축하 비행을 했다. 아사히 신문사의 깃발은 욱일기와 닮은 것으로 유명하다. 욱일기는 군기로서 지금도 해상 자위대가 공식적으로 쓰고 있다.

대회 결과는 경성 중학의 우승이었다. 총독부 중학교로 최초의 야구부가 만들어진 이래 경성 중학은 언제나 조선 중등학교 야구계의 중심에 있었다. 우승기 수여식에서 모리오카 사령관은 이렇게 훈시했다. “승패는 병가지상사다. 여유를 갖고 고시엔에서 잘 싸우고 돌아오라.”

기운 넘치게 고시엔에 출전한 경성 중학은 홋카이도 대표 아사히카와 상업에 대승을 거뒀다. 한 회에 다섯 점을 얻었다는 전보는 정오 무렵에 오사카 아사히 신문사 경성 지국으로 전해졌다. 속보를 기다리며 지국 주위를 둘러싼 시민은 환호성을 지르며 들끓었다. 그 뒤에도 경성 중학의 우세가 계속되자 회사와 은행의 심부름꾼이 결과를 알아보려고 들락날락하며 전보 내용을 종이에 적어 벽에 붙였다. 시민들은 종이에 풀칠하는 것을 도왔다. 만세 소리가 메아리치고, 경성 안은 평소와 다른 열기에 둘러싸였다. 하지만 2회전에서 만주의 강호 다롄 상업과 맞붙었다. 투수의 부상이라는 악재 속에 17 대 3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그 뒤 다롄 상업은 만주에 돌아가던 도중 경성에 들러 용산 중학과 경기를 치르기도 했다. 용산 중학은 원정 시합의 피로가 쌓인 다롄 상업에 승리를 거두며 복수를 대신한 셈이 됐다.

만주 야구계의 중심, 관동주와 화베이

한편, 다롄 상업이 있던 만주 중등학교 야구계는 상황이 어땠을까. 내가 외지의 야구에 관해 타이완, 조선, 만주 순서로 쓰는 건 일본의 아시아 진출이 타이완에서 시작해 조선을 거쳐 만주로 확대됐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일본의 군사 행동과는 별개로 담담한 일상이 반복됐다. 대일본 제국이라는 꿈에 취해 많은 일본인이 바다를 건넜고 그 땅에서 야구에 열중했다.

중국 대륙에서는 1912년 다롄에서 열린 남만 공업과 다롄 상업의 정기전이 중등학교 야구의 실질적 시작이다. 두 학교는 각각 만주 구락부와 다롄 실업단이라는 사회인 야구계의 양대 산맥이 지도를 해줬다. 두 학교의 정기전이 해마다 열기를 더하자 학교 측은 혼란을 우려해 경기를 중단시켜 버렸다. 이에 경기 재개를 바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학교 측은 허가하지 않았다. 4년 뒤인 랴오둥 신보 관계자가 관여하면서 정기전은 가까스로 재개됐다. 그 사이의 공백기에는 타이완이나 조선과 마찬가지로 실업단 야구 시합인 관동주 야구 대회 등에 참가해 사회인 팀과 시합을 하며 실력을 가다듬었다.

다롄은 러일전쟁이 끝난 뒤 포츠머스조약으로 일본이 권리를 얻은 랴오둥 반도 끝에 위치한 만주의 남단이다. 만주는 북쪽과 동쪽이 아무르강(흑룡강)과 우수리강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의 시베리아 지방과 마주했다. 남부는 압록강에 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다싱산맥을 사이에 두고 몽골과 접한 광대한 지역이다. 이곳에서는 예전부터 여러 민족이 섞여 살아왔다.

그러다가 이 땅에 만주족이 후금을 일으키고, 중국을 통일하면서 국호를 ‘청’(淸)으로 칭했다. 하지만 17세기에 들어서며 러시아가 남하해 왔고, 때때로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윽고 청나라가 약해지자 러시아의 남하를 제지할 수가 없게 됐다. 의화단 사건이 한창이던 1900년 러시아군이 청나라 사람 2만 명 이상을 학살하고 강에 시신을 던져버린 ‘아무르강 사건’이 일어났다. 러시아가 계속해 만주 지역을 점령하자 일본의 여론은 격렬히 반응했다. 다음에 조선을 점령할 테고 일본까지도 공격해오지 않겠느냐며 두려워했다. 냉정히 반응하자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러시아를 상대로 한 주전론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러일전쟁 중에는 현지의 마적이 일본과 러시아 양쪽 편으로 나뉘어 싸우기도 했다.

러일전쟁 말기에 최남단 다롄에는 전쟁 승리의 기세를 타고, 일확천금을 노리는 일본 상인들이 도하 허가증을 쥐고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러시아의 조계지였던 다롄이 일본에 양도되면서 더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살았다. 이 시기에 러시아어로 ‘먼 곳’을 뜻하는 ‘다리니’라는 지명이 ‘다롄’으로 바뀌었다. 다롄이 있는 랴오둥반도는 정확히 말하면 관동주였다. 이곳에서는 일찍부터 야구가 한창이었다. 그 지역 내에도 일본인이 만든 거리로 불리는 다롄이 중심지가 됐고, 이를 뒷받침한 건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 즉 ‘만철’(滿鐵)이었다. 포츠머스조약에 따라 양도받은 동청 철도의 남만주 지선과 부속지의 경영을 위해 만들어진 국책회사였다.

자본금 2억 엔의 거대 기업이던 만철은 만주 경영 전반에 관여함은 물론, 스포츠와 문화에서도 큰 영향력이 있었다. 만철은 1907년에 도쿄에서 다롄으로 본사를 옮겼고 인재 육성을 위해 본사 내에 견습 야학교를 열어 야구부를 만들었다. 다롄에는 메이지 말기부터 이미 와카바회, 만철 사원 그룹, 부두 그룹, 여순 공과 학당, 미쓰이 물산 같은 야구팀이 있었다고 한다. 1879년 9월에는 다롄에 정박하던 미국 군함 팀과 만철 팀의 시합이 있었다. 이것이 다롄에서 열린 최초의 시합으로 불린다.

만철은 다이쇼 시대에 내지의 대학 야구에서 활약하던 인기 선수들을 모아서 뒤에 만주 야구계를 대표하는 만주 구락부를 창설했다. 다음 해에는 이에 대항하는 모양새로 만철 이외의 실업계가 모인 다롄 실업단이 결성됐다. 다롄에서는 이 두 팀이 패권을 다퉜다. 만철의 후원으로 내지에서 차례차례 강호 팀들이 원정을 왔다. 원정 팀에서 다롄 팀으로 입단하는 선수도 생겼다. 다롄의 야구는 인기와 실력이 동시에 늘었다. 그때는 마침 일본 전체가 만주로 눈이 쏠리던 시기였다. 다롄은 활력이 넘치는 도시였고 내지에서도 볼 수 없는 화려한 시가지가 늘었다. 또한 모던한 시민 생활이 영위됐는데 야구는 그런 도시의 상징적 존재였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즉 다이쇼 시기의 절반에 해당하는 시점부터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직전 무렵, 다롄의 사회인 야구는 놀랄 만한 수준이어서 일본 전체에서도 톱클래스였다. 그 증거로 1927년 8월에 열린 대도시 열두 곳 대항 야구 시합(오늘날 도시 대항 야구 대회)의 기념비적인 제1회 대회에서 만주 구락부는 오사카 대표 팀에 승리하면서 우승을 차지하고, 흑사자기를 품고 귀향했다. 우승 팀이 만주 대표였다는 사실은 내지의 일본인들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감독이던 나카자와 후지오는 명연설을 남겼다.

“협의와 용기를 가진 에도의 팬들이여, 흑사자가 바다를 건너더라도 슬퍼하지 말지어다. 현해탄을 건너 황해를 지나 랴오둥반도 어딘가에 흑사자의 깃발이 펄럭일 때 그 깃발을 보고 우리 동포 20만의 사기는 그 얼마나 고무될 것인가.” (『도시 대항 40년사』)

이렇게 우승 깃발은 흑사자기라는 애칭이 널리 퍼졌다. 한편, 나카자와 감독은 메이지 대학에서 톈진 야구단을 거쳐 만주 구락부에 입부해 대륙에 꿈을 건 야구인이었다. 전후에는 일본 프로야구 퍼시픽리그 초대 전임 회장을 역임하고, 일본 야구 전당에도 헌액됐다.

이듬해는 다롄 실업단, 그다음 해는 만주 구락부가 우승을 차지하면서 3회 대회까지 만주 대표가 우승 팀이 됐다. 다롄 삼중의 6회 졸업생인 호쇼 가즈시게의 회고를 보자. “만구(만주 구락부)와 실업(만주 실업단)의 대결은 도시 대항 야구 대회의 출전권이 달린 경기여서 다롄의 팬들이 양편으로 나뉘어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드는 대단한 행사였다. 이런 일이 있었기에 다롄에는 만구 구장과 실업 구장의 두 야구장이 중앙 공원에 있었다.”

‘만주’라고 하면 만주국을 떠올린다. 하지만 만주국이 건국된 해는 1932년이고, 그 오지에 장제스가 들어온 시기는 훨씬 더 뒤다. 그 이전에는 화베이와 관동주가 중심이었다. 그 뒤에도 본래의 만주에서는 생활 자체가 매우 힘들었고, 주변 중국인과 알력도 있었다. 여유롭게 야구에 전념하기는 어려웠다. 만주 지구의 중등학교가 항상 불안정했다는 건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니시와키 요시토모의 자비 출판 3부작 가운데 만주 편은 제목이 『만주 · 관동주 · 화베이 중등학교 야구사』다. 이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 ‘만주 대표’라 하면 화베이와 관동주를 포함한다. 관동주는 포츠머스조약에 따라 러시아로부터 양도받은 랴오둥반도 선단부와 남만주 철도의 부속지를 말한다. 이 책이 놀라운 점은 저자인 니시와키에게 의뢰를 받아 쓴 수기가 실렸다는 점이다. 데이터만으로는 알 수 없는 여러 일화와 시대의 분위기가 전해진다.

(다음 회에 계속)



1. 이해에 휘문고보는 학교의 부조리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동맹휴교로 학사 일정이 마비됐다. 휴교를 주도한 인물이 야구부원이자 뒷날 단편소설 「달밤」(1934), 「가마귀」(1936)를 쓴 소설가 상허 이태준이다.

2. 조선 말기부터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는 데 앞장서고, 이후 친일파에 가담해 중추원 참의, 경북 지사, 전북 지사를 역임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으로서 총독부 학무국장에 오른 이는 엄창섭과 이진호, 단 두 명뿐이었다. 이진호는 말년에 일본 귀족원 의원에까지 올랐다.

가와니시 레이코(川西玲子)
1954년생. 주오 대학 대학원 법학연구과 석사 과정(정치학)을 수료했다. 1985년 재단법인 일본 시스템 개발 연구소(당시 재무성 관영)의 연구 1부 사회 시스템 연구실에서 근무하다 양육 문제로 퇴직했다. 그 뒤 제4기 도쿄도 여성 문제 협의회 위원에 취임하고, 도쿄 학예 대학 비상근 강사로 근무하며 일반 시민의 눈으로 보는 일본 근대사를 중심으로 저술 활동을 해왔고, 일본 근대사를 주제로 시부야에서 토크쇼와 영화제를 열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중국 산둥성 칭다오 출생으로 1938–1939년 두 차례에 걸쳐 만주 대표 톈진 상업 투수로 출전했다. 지은 책으로는 『역사를 알면 더 재미있는 한국 영화』(歴史を知ればもっと面白い韓国映画, 2006), 『영화가 말해주는 쇼와사』(映画が語る昭和史, 2008) 등이 있다.

옮긴이. 양두원
KAIST에서 화학공학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다. 프로야구 원년 MBC 청룡 이래 LG 트윈스의 오랜 팬이다. 2000년대에 들어 응원하는 팀이 암흑기에 빠지자 우울한 마음을 다스리려고 스페인 축구와 고시엔(甲子園, 갑자원)을 파기 시작했다. 2010년 우연히 놀러간 고시엔에서 오키나와 대표 코난 고교의 기념비적 우승을 접한 뒤 본격적으로 팬이 되어 지금은 매년 여름 고시엔 구장에서 경기를 관람하는 게 연례행사가 됐다. 모 방송국에서 카메라 기자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