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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만주에서 퍼져가는 야구 소년들의 꿈 4
가와니시 레이코

2025년 3월 11일 게재

출처: 가와니시 레이코, 『플레이볼: 조선·타이완·만주에서 꽃핀 야구 소년들의 꿈』, 양두원 옮김(워크룸 프레스, 2017), 100–109.

사회인 팀과 호각을 다툰 뤼순 중학

관동주와 만주에 처음 세워진 일본 중등학교인 뤼순 중학은 1909년에 개교했다. 러시아가 세운 서양풍의 건물을 관동 도독부가 고쳐 학교 건물로 삼았다. 러일전쟁이 끝난 지 4년째가 되던 해에는 중등학교가 필요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일본인 수가 늘었다고 한다. 극소수이긴 해도 일본인 외에도 자산가 집안의 조선인, 몽골인도 있었다.

뤼순 중학은 관동주를 대표하는 진학 중심 학교로서 졸업한 뒤에는 내지의 대학교에 진학하는 이들도 있었다. 1918년 무렵에는 교내에 야구를 좋아하는 학생이 늘면서 대외 시합을 하고 싶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진학을 중시하는 학풍 탓에 교장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개교 2년 뒤인 1911년에는 중국 대륙에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무너지고 다음 해에 중화민국이 건국된 것이다. 4,0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제국이 공화국이 된 것은 유사 이래 대사건이었다. 이에 따라 마지막 황제였던 선통제가 자리에서 물러나고 쑨원이 임시 대총통에 올랐다. 하지만 이제 막 태어난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은 그 기반이 약하고, 쑨원은 위안스카이에게 쫓겨나면서 중국은 군벌이 할거하는 엄청난 혼란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중국에 있던 일본인은 어떻게 지냈을까. 우려와 달리 대다수 일본인은 중국인이든 정세든 크게 상관하지 않고 동란과는 동떨어진 세계에서 평온하게 살았다. 같은 땅에 살더라도 자기 신변에 영향만 미치지만 않는다면 그리 관계없다는 생각이었다.

자, 이제 뤼순 중학 이야기를 해보자. 초대 야구부장 이토 마사미가 학교 대항 시합이 가능한 경위를 수기로 남겼다. 이토는 1919년 7월에 부임해 내지의 유명 학교에도 없는 훌륭한 백네트가 교정에 펼쳐진 모습을 보고 놀랐다.

“그래서 내심 이 학교는 소문으로 들은 바대로 교과 시간 중에 체육을 충실히 하는 것 외에 방과 후 지도에도 힘을 쏟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뒤 재학생들에게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 생각은 지나친 것이었다. 뤼순 중학의 학생들이 나가는 대외 스포츠로는 5월에 만철 본사에서 열리는 운동회에 이어달리기 선수가 네 명 정도 출전하는 것뿐이고 다른 운동은 전혀 없다고 했다.

“그렇게 훌륭한 네트가 있는데, 교내에서만 훈련이나 시합을 할 뿐이었다. 다롄 공업이나 다롄 상업이 실업단과 만철 양 팀의 시합에 자극을 받아 두 학교 간 대항전을 하는 모습을 보면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될지 안 될지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다른 학교와 시합을 할 수 있게 허가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이토는 가쓰우라 교장과 주로 체육에 관한 이야기를 화제에 올릴 때 우선 네트가 무척 훌륭하다고 치켜올린 뒤 왜 대회 시합을 허가하지 않는지 들어 봤다고 한다. 교장의 답은 이랬다. “대외 시합을 하면 학업을 소홀히 하기 십상이다. 또 시합이 끝난 뒤 난투극이 일어난다든가 상급생이 하급생에게 완력을 휘두르는 사건이 일어나기라도 하면 곤란해진다.” 그러자 이토는 내지에서 열리는 대외 시합이 어떤 식으로 치러지는지 설명했다. “선생님께서 걱정하시는 것처럼 그런 일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야구로 얻을 수 있는 게 더 많습니다.” 며칠 뒤 시합 규정 초안을 만들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 초안을 토대로 교장과 이토가 내용을 보충해 직원회의에 올렸다. 그 결과, 부랴부랴 봄가을 2회에 한해 대회 시합을 인정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뤼순 중학은) 가을에 첫 시합으로 치른 다롄 상업과의 시합에서 승리하고, 게다가 선수와 응원단도 절도를 갖췄기에 무엇보다 다롄의 일반 시민들부터 칭찬을 받았다. 학교 또한 그 뒤 연 2회였던 대외 시합 수를 다음에는 대폭 늘려준다고 허가를 해줬다.”

아직 중등학교 야구 대회가 없었기에 뤼순 중학은 그 뒤 만주 야구 대회에 참가해 사회인 팀과 시합을 치렀다. 예컨대 1921년에 관동주 야구 대회에서 1회전에 다롄 부두 팀과 맞붙어 쾌승을 거뒀다. 준결승에서도 다롄 기선에 승리를 거뒀다. 결승전에서 미쓰이 물산에 패했다. 하지만 12회 졸업생 시로이 야스오에 따르면, “뤼순 중학의 명성은 높아져 일약 주목을 받았다.”

1921년, 만주 지구 예선

1921년에 대망의 제1회 만주 지구 예선이 열렸다. 지역 신문인 『오사카 아사히 신문』 만주판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만주의 중등학교는 조선보다 수가 적었다. 하지만 감독 관청의 압력이 없었기에 야구만큼은 비교적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었다.” “올해는 펑톈 중학, 창춘 상업 같은 새로운 학교들이 진용을 갖추지 못하고, 다롄 중학은 우슈와 스모를 장려하는 데 열중하면서 야구에는 뜻을 두지 않아 결국 다롄 상업, 남만 공업, 뤼순 중학 등 세 학교만으로 대회를 치러야 했다.” 야구를 둘러싼 여러 의견과 대립은 여전히 계속됐다.

다롄보다 북쪽에 위치한 펑톈 중학과 더 북쪽의 창춘 상업 같은 새로운 학교들은 아직 대외 시합을 벌일 수준을 갖추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리가 너무 멀었다. 이동 자체가 부담이었다. 기념비적인 제1회 지구 대회 예선은 7월 10일 랴오둥 신보사가 주최하고 뤼순 공업대학의 후원으로 뤼순 공대 그라운드에서 열렸다. 우승 학교인 다롄 상업은 정식으로 고시엔의 흙을 밟을 수 있게 됐다. 다롄 상업은 1910년 한일 합방이 체결된 해에 관동 도독부 장관이 지부장을 맡던 동양협회 만주지부가 야간부 상업학교로 세웠다. 2년 뒤에는 야간부를 병설로 갖춘 갑종(甲種) 상업학교로 승격되고, 1911년에는 새로운 학교 건물이 완공됐다. 학교의 모체인 동양협회 만주지부가 1923년에 독립하면서 이를 계기로 관립으로 바꿔달라는 진정을 매년 넣었다. 하지만 여러 악조건이 겹치면서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학교의 역사도 끝을 고하면서 1943년에는 결국 다롄시로 이관됐다. 졸업생은 약 4,500명. 현재 학교 건물은 다롄시 제36 중학교로 쓰이고 있다.

당시 야구팀 주장인 이마야 리사쿠는 처음 고시엔에 참가한 때의 심경을 이렇게 술회했다. “어쨌든 선수 전부가 모국을 알지 못하는 형편이어서 내지 중학교 선수들의 실력을 전혀 몰랐습니다. 만주에서도 대학 팀 시합은 자주 봤지만, 내지 중등학교 팀 시합은 수년 전 간사이 학원 중등부가 다롄에 왔을 때 본 게 전부였죠. 어떻게 작전을 세워야 좋을지, 그리고 내지의 선수와 어느 정도로 싸울 수 있을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는 만주에서 온 첫 대표 팀이었기에 만주 야구를 소개하기 위해서도 끝까지 당당히 죽을힘을 다할 생각이었습니다.”

이렇게 다롄 상업은 바다를 건너 첫 시합으로 간토 대표인 류가사키 중학과 일전을 치렀다. 결과는 5 대 3의 승리였다. 2회전을 거쳐 3회전에도 주고쿠 지방 대표인 오카야마 일중과 큰 점수 차를 벌리며 16 대 7로 대승을 거뒀다. 결국 준결승에서 교토 일상에 졌지만, 첫 출전에 4강 진출은 대단한 성적이었다. 교토 일상은 그 뒤 9월 만주로 원정을 떠나 뤼순 중학과 시합을 치르기도 했다.

한편, 1921년은 중국 공산당이 세워진 해다. 설립 대회는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 지역 어딘가에서 은밀히 열렸다. 당국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조계지 안은 조금이나마 외부보다는 안전했기 때문에 반정부 운동은 조계지를 거점으로 벌어지곤 했다. 하지만 곧 경찰이 들이닥쳐 참가자들은 뒷문으로 도망가야만 했다. 대회장인 왕지루(望志路) 106호는 지금 ‘신티엔디’(新天地)로 불리는 화려한 거리에서 중국 공산당 제1차 전국 대회가 열린 자리로 남아 있다.

다롄 상업, 결승전 진출

1922년을 맞이한 제2회 만주 지구 예선 대회도 전해같이 세 학교가 참가해 치러졌다. 우승 학교는 남만 공업학교였다. 하지만 고시엔 1회전에서 리쓰메이칸 중학에 패했다. 남만 공업은 메이지 시대인 1911년 만철이 세운 사립학교로 다롄 상업의 라이벌이었다. 뒤에 공업 전문학교로 승격하면서 중등학교 야구계에서는 모습을 감췄다.

다음 해인 1923년 만주 지구 예선에 앞서 치러진 제8회 관동주 야구 대회에서 남만 공업과 다롄 상업 모두 1회전에서 사회인 팀에 승리했다. 원정을 떠나 맞붙은 내지의 고료 중학에도 남만 공업이 승리를 거두는 등, 기세가 한껏 달아오른 가운데 7월의 지구 예선을 맞게 됐다. 참가 학교는 세 곳에, 처음으로 출전한 펑톈 중학까지 가세했다. 뤼순 중학은 이해에 불참했다. 참가 의사를 밝힌 북부의 창춘 상업과 내륙의 안산 중학은 부원 수가 적었다. 결국 대회에 참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안산은 현재 랴오닝성에 있다. 남만주 철도는 1918년 안산 제철소를 세웠다. 사기업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만철에서 나뉜 국책회사로 최전성기에는 후쿠오카현의 야하타 제철소 다음가는 생산량을 기록할 정도였다. 제2회 만주 지구 예선이 벌어진 건 안산 제철소가 가동된 지 3년째 되던 해였다. 아마도 한꺼번에 인구가 증가하면서 필요에 따라 중학교가 세워졌을 테다.

이해의 지구 예선 우승 팀은 다롄 상업이었다. 기세 좋게 고시엔에 출전했지만, 1회전에서 조선 대표 휘문고보에 패했다. 휘문고보는 조선 학생만으로 이뤄진 팀으로 조선 대표는 만주 대표와 마찬가지로 이번이 세 번째 출전이었다.

여름 고시엔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지에서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다. 1915년 21개조 요구안을 중국에 제출한 이래 중국에서는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일본을 향한 반감이 커지고, 이런 반감은 4년 뒤 5 · 4 운동으로 폭발했다. 하지만 관동대지진이 일어나면서 반일 감정과는 별개로 동정 여론이 모이기도 했다. 신문은 1면에서 지진의 참상을 전하고, 관민이 합심해 지원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렸다. 가두 모금 활동이 벌어져 연예인, 군벌도 의연금을 모으고 물자와 현금을 보내기도 했다.

이로부터 2년 뒤인 1925년 지구 예선 대회가 벌어지기 전, 만주 중등학교 야구계에는 격랑이 일었다. 다롄 상업과 함께 야구계를 이끌어 온 남만 공업이 더는 대회에 나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지역 신문의 사전 예상에서는 원통함이 드러났다. “이 지방은 식민지인 까닭에 아직 중등학교 수가 적고 내지 같은 성대함은 바랄 수 없다. 예년에는 서너 학교 사이에서 패권을 다퉜기 때문에 연중행사의 하나로 야구팬들의 흥미를 자아냈으나 조금 부족한 감이 있다. 게다가 만주 중등학교의 양대 산맥인 다롄 상업과 남만 공업은 각각 다롄 실업단과 만주 구락부의 지원으로 성장해 왔다. 다롄 상업의 라이벌인 남만 공업이 올해에 전문학교로 승격되면서 네 학급에 마흔두 명만 남는 바람에 야구 대회에 나갈 수 없게 돼 더욱 씁쓸하다. (…) 다롄 일중에 야구부가 있으면서도 교장 고집 때문에 대외 시합을 절대 금하니 매우 유감이다.”

펑톈 중학은 주요 선수들이 졸업하고 난 뒤 선수를 보충하지 않았고, 출전 예정이던 창춘 중학은 정기 시험과 겹쳐서 경기에 나설 수가 없었다. 푸 중학, 안산 중학, 다롄 이중은 개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참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지구 예선은 열리지 않았고, 이전 대회의 우승 팀인 다롄 상업이 추천 형식으로 고시엔에 출전했다. 지역 신문은 한탄했다. “사회인 야구는 흥하는데, 중등 야구는 왜 이 모양인가?” 만주 중등 야구계는 이후에도 출전 학교 수가 적은 문제를 계속 고민해야 했다. 하지만 이해에 다롄 상업은 고시엔에서 센다이 이중을 압도하며 준결승까지 진출해 대륙 야구 소년의 기상을 보였다.

1925년 준결승에 진출한 다롄 상업 팀.
고시엔 결승전에서 선전한 다롄 상업 팀을 격려하는 아사히 본사의 무라야마 류헤이 사장.

그리고 다이쇼 최후의 해인 1926년 지역 신문은 기사를 실었다. “올해 지구 대회는 창춘 상업, 칭다오 중학 등의 신예도 더해져 7월 30일부터 3일 동안 랴오닝 신보 주최로 다롄 만철 그라운드에서 열렸다. 다롄 상업은 수준이 한 차원 높았다. 하지만 내륙에서 기술 연마에 여념이 없는 창춘 상업, 바다를 사이에 두고 출전한 칭다오 중학 등 어느 팀이나 수준이 상당하다.” ‘내륙’이나 ‘바다를 사이에 두고’라는 표현에서 중국 대륙의 광활함을 느낄 수 있다.

화베이의 칭다오 중학이 참가하면서 이해의 지구 예선은 활기가 넘쳤다. 보하이해를 끼고 해안가에 위치한 산둥성은 1920년부터 독자적으로 산둥 야구 대회를 열고, 칭다오 중학도 사회인 팀과 섞여 활약했다. 칭다오 중학은 창춘 상업에 승리하는 등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우승은 역시 다롄 상업이 차지하면서 다섯 번째로 고시엔에 출전했다. 다롄 상업은 이해에 고시엔에서 나니와 상업, 쓰루가 상업, 경성 중학, 와카야마 중학을 연파했다. 마지막에 시즈오카 중학에 아쉽게 패했지만, 건투는 놀라웠다. 외지 대표의 결승전 진출은 이해와 1931년(자이 농림)의 두 번뿐이다. 다롄 상업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조선에 들러서 철도, 상공 회사 등과 경기를 치렀다. 귀국한 뒤에는 관동청 시정 20주년 기념 대회에서 남만 공업 전문학교와 뤼순 공과대학을 꺾으며 활약했다.

다롄 상업은 황금시대를 맞이하고, 그 뒤에도 1934년까지 거의 매년 만주를 대표해 고시엔에 계속 나갔다(통산 12회). 하지만 1935년에 자체적으로 해산하면서 야구부 폐지라는 충격적 결말을 맞아 그렇지 않아도 약한 만주 중등 야구계는 더욱 약체로 전락했다. 해산 이유는 ‘교우회비 절감’이었지만, 명백히 전쟁 때문이었다. 무엇이 다롄 상업을 궁지로 몰아넣었는지는 뒤에서 얘기하겠다.

(「조선과 만주에서 퍼져가는 야구 소년들의 꿈」 연재를 마칩니다.)

가와니시 레이코(川西玲子)
1954년생. 주오 대학 대학원 법학연구과 석사 과정(정치학)을 수료했다. 1985년 재단법인 일본 시스템 개발 연구소(당시 재무성 관영)의 연구 1부 사회 시스템 연구실에서 근무하다 양육 문제로 퇴직했다. 그 뒤 제4기 도쿄도 여성 문제 협의회 위원에 취임하고, 도쿄 학예 대학 비상근 강사로 근무하며 일반 시민의 눈으로 보는 일본 근대사를 중심으로 저술 활동을 해왔고, 일본 근대사를 주제로 시부야에서 토크쇼와 영화제를 열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중국 산둥성 칭다오 출생으로 1938–1939년 두 차례에 걸쳐 만주 대표 톈진 상업 투수로 출전했다. 지은 책으로는 『역사를 알면 더 재미있는 한국 영화』(歴史を知ればもっと面白い韓国映画, 2006), 『영화가 말해주는 쇼와사』(映画が語る昭和史, 2008) 등이 있다.

옮긴이. 양두원
KAIST에서 화학공학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다. 프로야구 원년 MBC 청룡 이래 LG 트윈스의 오랜 팬이다. 2000년대에 들어 응원하는 팀이 암흑기에 빠지자 우울한 마음을 다스리려고 스페인 축구와 고시엔(甲子園, 갑자원)을 파기 시작했다. 2010년 우연히 놀러간 고시엔에서 오키나와 대표 코난 고교의 기념비적 우승을 접한 뒤 본격적으로 팬이 되어 지금은 매년 여름 고시엔 구장에서 경기를 관람하는 게 연례행사가 됐다. 모 방송국에서 카메라 기자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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