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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만주에서 퍼져가는 야구 소년들의 꿈 2
가와니시 레이코

2025년 2월 25일 게재

출처: 가와니시 레이코, 『플레이볼: 조선·타이완·만주에서 꽃핀 야구 소년들의 꿈』, 양두원 옮김(워크룸 프레스, 2017), 73–83.

일제 통치 아래 발전한 조선 야구

1919년은 조선에서 3 · 1 운동이 일어난 해다. 일본에 병합된 지 9년째에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독립 선언식을 거행한 데에 자극받아 시작된 이 독립운동은 한반도에 큰 물결을 일으켰다. 경성에서 낭독된 독립선언문은 각지로 옮겨지고, 많은 사람이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부르며 행진했다.

조선총독부는 병합 전부터 이미 ‘의병 운동’으로 불린 저항운동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강권에 따른 무단 통치였다. 그 효과 때문이었는지, 이 무렵 표면적으로는 저항운동이 잦아들었다. 3 · 1 운동 이후에는 이른바 ‘문화 통치’를 펼친다. 조선 야구의 발전사는 이 시대와 겹친다. 타이완과는 달리 독자적 문화가 확립된 조선에서의 저항은 격렬했다. 하지만 『조선야구사』에는 그런 사회 정세를 다룬 기술이 전혀 없다. 야구사에 관한 책이라 이상할 게 없지만, 가능하다면 일본의 일반인이 당시의 정세를 어떻게 봤는지 알고 싶다. 일본인과 자주 시합을 치른 조선 팀, 예컨대 오성 구락부 등은 어떤 입장이었고, 여기에 조선 야구사 초기에 큰 역할을 한 유학생들의 위치는 어땠는지도 말이다.

대한제국이 마지막으로 유학생을 보낸 건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된 해다. 이 협약에 따라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상실하고, 실질적으로 일본의 보호국이 됐다. 다케이 하지메의 『황실 특별 파견 유학생, 대한제국에서 온 50인』(皇室特派留学生—大韓帝国からの50人, 2006)은 대한제국에서 일본에 최초로 보내진 유학생 쉰 명의 모습과 그 뒤의 인생을 추적한 귀중한 책이다. 이 책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담겨 있다. 그들은 일본 유학 중에 나라를 잃었다. 하지만 귀국한 뒤에는 근대화의 첨병이 돼 결국은 그 가운데 많은 이가 일본 통치에 협력한다. 그 이유 중 하나를 들면, 귀국한 뒤 엘리트로서 사회의 상층부에 위치했기 때문일 테다. 식민지의 엘리트는 지배자에 가깝다. 식민지 지배를 둘러싼 인식은 그 사람이 위치한 자리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들은 일본에서 서양식 근대화를 맛봤기에 일본에 호의적일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1차부터 3차까지의 한일협약으로 조선이 차례차례 주권을 잃을 때 의병운동 중심에 있던 이들이 전통 유림이었다는 사실과 대조적이다.

선교사인 필립 질레트가 만든 조선 최초의 팀인 황성 YMCA 야구단을 그린 영화 「YMCA 야구단」은 대한제국이 실질적으로 일본의 보호국이 됐을 무렵의 이야기다. 코미디 영화지만, 역사를 조금만이라도 알고 보면 꽤나 복잡한 문제를 묘사했음을 알 수 있다. 제2차 한일협약이 체결되면서 황성 YMCA 야구단은 항상 쓰던 야구장을 일본의 주둔군에게 갑자기 빼앗기게 됐다. 이로써 야구 시합은 결말을 고하는가 싶었지만, 마침 주둔군의 장교와 황성 YMCA 야구단의 투수는 도쿄에서 함께 야구를 한 친구 사이였다. 두 사람은 미묘한 관계에 놓였다. 한편, 계층이나 복장이 제각각인 황성 YMCA야구단 안에서도 각자 입장은 다 달랐다. 항상 양복을 입던 멋쟁이 젊은이는 아버지가 일본의 협력자였다. 하지만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투수는 은밀하게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조선 사회도 그 내부는 가지각색이라는 점을 엿볼 수 있다. 상황이 이런 조선인 야구단은 일본인 야구단이 진출하자 점차 침체되기에 이른다.

다음 해인 1920년 7월에는 호세이 대학이 다시 원정을 왔다. 호세이는 경성 구락부와의 대결을 필두로 스탠다드군, 철도군과의 시합에서 승리하고, 부산으로 내려가 전부산군을 패퇴시키고 경성에 돌아와 다시 철도군을 꺾었다. 전승이라는 결과를 얻었기에 의기양양하게 만주로 원정을 떠났다. 호세이의 경기는 어느 곳에서나 인기가 높아 많은 관중이 운집하곤 했다.

그 뒤 오랫동안 숨을 죽이던 유학생 야구단도 오랜만에 부활했다. 여름방학 때 돌아온 일을 계기로 교토 삼고(三高, 현재 교토 대학 예과) 출신의 박석윤을 중심으로 팀원을 조직해 경성과 용산의 팀과 시합을 치렀다. 7월 말에는 철도군과의 시합이 벌어졌다. 이미 철도군에 두 번 진 적이 있던 유학생 팀은 이번에야말로 필승을 노렸다. 경기는 격렬했다. 하지만 일몰이 되면서 중단됐다. 8월에는 조선체육협회 초청으로 메이지 대학 팀이 다시 원정을 왔다. 호세이 대학에 패해 권토중래를 노리던 조선 야구계에서는 우선 용산 철도군을 내세웠다. 결과는 2 대 1. 아쉬운 패배였다. 『조선야구사』에는 이제는 듣기 괴로울 정도의 야유가 날아들지 않았다면서 이날 경기를 두고 “(예전보다) 진일보해 기쁘다”라고 적혀 있다.

다음 날 경성 올스타 팀의 시합에서도 수많은 관중이 운집했다. 하지만 23 대 1로 메이지에게 대패했다. 이후에도 조선 팀은 연패를 거듭했다. 하지만 용산 철도군은 조선을 떠나려던 메이지 대학을 평양까지 따라가 다시 시합을 청하고, 결국 4 대 0으로 1승을 거뒀다. 이런 일화를 알게 되면 다시 한번 새삼스레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지금 평양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수수께끼의 거리가 돼버렸지만.

플레이볼, 고시엔 조선 지구 예선

1921년, 기념비적인 제1회 전 조선 중등학교 야구 대회, 즉 고시엔 조선 지구 예선이 열렸다. 실은 1916년에 이미 오사카 아사히 신문사가 조선 지구 예선 개최를 추진했다. 하지만 성사 직전 조선총독부에 의해 중지돼 버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짐작건대 조선 팀이 실력 부족으로 크게 패배할까 봐 두려워해서 아니었을까. 이후에 내지에서 와세다 대학과 호세이 대학 등 강호가 내한하고 야구 열기도 끓어올랐다. 하지만 총독부는 지방 예선 개최를 허가하지 않았다. 1919년 3 · 1 운동으로 무단 통치가 비판을 받고, 뒷날 2 · 26 사건으로 살해된 해군 대장 사이토 마코토가 조선 총독에 올라 문화 정치로 전환하자 야구 경기 여부는 교장에게 일임됐다. 야구 압박은 조선인이 다니는 학교에서 특히 더 심했다고 한다. 그런데 방침이 바뀌며 이런 훈령이 내려왔다. “내지인 학교, 조선인 학교를 불문하고 일제히 야구부를 만들라.” 대외 시합도 허가를 받아 조선 지구 예선 개최안이 진행됐다.

예선에 맞춰 조선체육협회에서는 주의 사항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 눈길을 끄는 항목은 응원 제한이었다. “박수 이외의 응원 금지. 단, 응원가는 해당되지 않음.” 이 사항은 이후에도 지속됐다. 당시 조선에서는 응원 태도가 아주 나빴다. 각 학교 학생과 보호자 가운데 야유를 날리는 사람이 있었겠지만, 일부 시민의 태도가 매우 좋지 않았다. 내지에서도 때때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일어나곤 했는데, 식민지인 조선에서는 한술 더 떠 응원을 빙자해 제멋대로 행동하는 이들이 있었다.

또한 이동 비용 같은 경비를 부담하는 데도 규칙이 있었다. “우승 학교에는 학교 소재지부터 오사카까지의 왕복 3등 기차 또는 증기선표 값을 열두 명까지 1인당 2엔을 오사카 아사히 신문사가 부담한다.” “오사카 체류 중(대회 전날부터 탈락 또는 우승할 때까지)의 숙박비 보조로 열두 명까지 1인당 2엔을 오사카 아사히 신문사가 부담한다.” “전 조선 예선 대회 출전 학교의 여비 또는 체류비는 해당 학교에서 자비 부담한다.” “지방에서 출전하는 학교는 미리 인원을 알려주면 협회 또는 경성 지국이 경성에 체류할 숙소를 알선한다.”

야구는 관련 용품 준비만으로도 돈이 드는 스포츠다. 대회가 열리면 이동 비용이나 숙박 비용 등이 필요하고, 학교의 부담도 상당했다. 그래서 주최 측인 오사카 아사히 신문사는 내지로 가는 우승 학교의 비용 부담을 자청했다. 그뿐 아니라 중등학교 야구에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그 인기는 신문사 경영에도 순풍으로 작용했다.

7월 24일 조선체육협회에서 주최하고 오사카 아사히 신문사 경성 지국에서 후원하는 제1회 조선 지구 예선 대회가 드디어 열렸다. 이 대회에는 경성 중학, 부산 상업, 용산 중학, 인천 상업 등 네 학교가 참가했다. 초대 우승 학교는 부산 상업이었다. 팀원 모두가 일본인이었다. 첫 조선 대표로 뽑혀 고시엔 흙을 밟은 부산 상업은 1회전에서 산인 지방 대표인 기쓰키 중학에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준준결승에서 강호 와카야마 중학을 만난 탓에 21 대 1로 대패했다.

부산 상업은 1906년 부산 거류민단이 세운 부산 상업학교가 시초다. 한일 합방 4년 전, 외지에 세워진 최초의 중등 교육기관이었다. 그 뒤 문부성의 인가를 받아 부산 공립 제일 상업학교가 됐다. 쇼와 시대에 들어서는 2층 벽돌의 새로운 교사와 강당이 완성됐다. 강당을 기증한 인물은 오쿠라 재벌의 오쿠라 기하치로였다.(주 1)

1922년 제2회 지구 예선이 열릴 때 이런 주의 사항이 발표됐다. “이 대회는 각종 분규나 위험을 피하기 위해 경기 출전 전 각 선수의 입학 연도, 현재 학년, 나이를 확인할 재학 증명서, 학교 건강진단서를 제출해야 함. 상기 사항을 숙지하고 참가하기 바람.”

이는 이전 대회에서 갖가지 문제가 생겼기 때문일 테다. 출전하는 학교마다 여러 문제가 나오게 된 데는 당시 학제가 지금과는 달리 다양하고 느슨했다는 배경이 있었다. 소학교(오늘날의 초등학교)에도 심상소학교와 고등소학교, 두 종류가 있었고, 중등학교에 들어가는 나이도 같지 않았다. 상업학교가 되면 나이가 더욱 들쑥날쑥해 그 가운데는 스무 살을 넘긴 학생도 있었다. 게다가 야구를 잘하는 학생을 불쑥 입학시키기도 했다.

경성 중학과 휘문고보

두 번째 지구 예선은 전년도 출전 학교에 부산 중학이 더해져 총 다섯 팀이 참가하고, 용산 만철 그라운드에서 열렸다. 개막식에서 정무총감 아리요시 주이치는 훈시를 했다.

“작년과 올해 내지에 가는 선수는 내지인 유학생뿐이다. 내년에는 조선인 학생들도 대표 선수로 오사카의 영광스러운 무대에 출전해 훌륭한 성적을 거둘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이 대회가 일선융화에도 적잖이 효과를 거둘 수 있기를 희망하는 바다.”

우승은 경성 중학에 돌아갔다. 경성 중학은 전교생이 응원을 왔고 교장은 연일 이른 아침부터 내빈석에 앉아 열심히 응원했다. 하지만 포수였던 시게다는 아버지가 출근한 동안 마음대로 외출할 수 없는 가정 분위기 탓에 하마터면 대회에 참가하지 못할 뻔했다. 교장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부모를 설득해 겨우 허락을 받았다. 시게다는 팀 동료를 따라 부산으로 가 오사카행 배에 올랐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경성 중학은 고시엔 1회전에서 고베 상업에 패하며 탈락했다. 경성 중학은 조선 중학 야구계의 중심이었다. 철도 그라운드에 필적하는 경성 유수의 그라운드가 있었다. 내지의 대학이 원정을 왔을 때도 때도, 이 두 구장에서 경기가 열렸다. 타이완의 타이베이 중학처럼 총독부 중학교로 개교하고, 경성 중학교, 경성 공립 중학교, 서울 공립 중학교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전후에는 서울고등학교로 다시 문을 열었다.

선수들이 부산에서 어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는지는 기록이 없다. 사실 그때는 제주도와 오사카 사이에 기미가요 마루가 취항했다. 당시 히가시오사카는 새로운 공업지대로 발전하고 있었고, 중소 공장들이 싼 임금의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한편, 토지를 잃어버린 조선 농민들은 오사카에서 일하기 위해 기미가요 마루를 타고 차례차례 오사카로 왔다.(주 2) 하지만 경성 중학 학생들이 탄 배는 아마 관부연락선이지 않았을까. 1905년에 제2차 한일협약이 체결되면서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잇는 항로가 생겨 운항이 개시됐다. 전쟁으로 중단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부관 페리가 그 명맥을 잇고 있다.

1923년 조선 지구 예선에는 전해에 아리요시 정무총감이 희망한 대로 조선인이 다니는 학교가 처음으로 참가했다. 지역 신문에는 「새로운 동포들이 참가한 조선 예선」이라는 관전기가 실렸다. “참가 학교 수는 작년보다 늘어서 여덟 곳이 됐다. 무엇보다 흥미롭고 의미 있는 일은 새로운 동포인 조선 선수들로 조직된 휘문고보가 참가했다는 점이다.”

휘문고보는 조선인 학교였다. 일본 통치 아래 조선은 오랫동안 일본인이 다니는 ‘중등학교’와 조선인이 다니는 ‘고등보통학교’로 나뉘어 있었다. “최근 조선인 청년들 사이에서는 맹렬한 향학열과 운동 열기가 끓어오른다고 들었다. 기뻐해야 마땅할 일이다. 특히 휘문고보는 전 조선을 통틀어 가장 열심히 운동을 장려하는 학교로 야구 기술도 조선 최고다. 물론 올해 결과는 섣불리 예단할 수는 없다. 만일 휘문고보가 조선의 패권을 잡아 고시엔에 출전할 수 있다면, 내선 융화 관점에서 봐도 더할 나위 없는 일이다.”

휘문고보는 오늘날 휘문고등학교로 서울에 있다. 이 휘문고보가 결승전에서 경성 중학을 꺾었다. 10 대 1의 압승이었다. 지역 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조선인 중학교가 내지 중등학교와 공식 시합을 치른 건 조선 유사 이래의 사건이다. 더욱이 조선인 학교가 우승하고, 내지 동서각지 우승 학교와의 쟁패전에 참가한다는 사실은 조선 측면에서 보더라도 큰 의의가 있다.”

저고리를 입은 휘문고보 응원단.

이 대회는 뜻있는 야구팬들의 골치를 썩인 야유도 거의 없었다. 전전긍긍하던 관계자들은 안도했다. 고시엔에서 휘문고보는 1회전을 부전승으로 통과한 뒤 2회전에서 만주 대표인 다롄 상업과 맞붙었다. 지역 예선이 시작된 지 3년째 되던 해에 조선 학생으로만 이뤄진 팀이 정점에서 빛날 뿐 아니라, 최초로 내지에서 만주 대표와 맞붙는다는 건 일대 사건이었다. 구장도 크게 들끓지 않았을까.

시합은 휘문고보의 승리였다. 신문에는 이런 관전평이 실렸다. “미지수라고 한 휘문의 시합을 보면서 일단 거칠고, 주루, 투구, 수비가 모두 매우 투박하면서도 강한 모습이라고 느꼈다. 세세한 플레이에 구애받지 않고 당당하면서도 선 굵은 플레이를 하는 모습을 보니 마치 미국 프로야구 선수단을 보는 듯하다.” 지금도 일본인이 위화감을 가지곤 하는 민족성을 이 기사에서는 미덕으로 평가했다. 준준결승에서는 아쉽게도 리쓰메이칸 중학에 패했다.

(다음 회에 계속)



1. 당시 일본의 5대 재벌이었으며 조선에서 선린 상업(선린 상고를 거쳐 오늘날 선린 인터넷 고등학교)을 세우기도 했다. 문화재에 관심이 많던 그는 여러 차례 조선을 드나들며 약탈이나 다름없는 방식으로 문화재를 모았다. 성이 비슷하고 행적도 닮아 혼동하곤 하지만, ‘오구라 컬렉션’으로 유명한 오구라 다케노스케와는 다른 인물이다.

2. 이 책에도 언급되는 재일교포 감독 최양일의 영화 「피와 뼈」(2004)의 오프닝은 주인공 김준평을 비롯해 조선 사람들이 기미가요 마루를 타고 오사카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김찬정의 『기미가요 마루를 타고 간 이방인들: 조선인 거리 이카이노 형성사』(異邦人は君ケ代丸に乗って: 朝鮮人街猪飼野の形成史, 1985년) 참조.

가와니시 레이코(川西玲子)
1954년생. 주오 대학 대학원 법학연구과 석사 과정(정치학)을 수료했다. 1985년 재단법인 일본 시스템 개발 연구소(당시 재무성 관영)의 연구 1부 사회 시스템 연구실에서 근무하다 양육 문제로 퇴직했다. 그 뒤 제4기 도쿄도 여성 문제 협의회 위원에 취임하고, 도쿄 학예 대학 비상근 강사로 근무하며 일반 시민의 눈으로 보는 일본 근대사를 중심으로 저술 활동을 해왔고, 일본 근대사를 주제로 시부야에서 토크쇼와 영화제를 열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중국 산둥성 칭다오 출생으로 1938–1939년 두 차례에 걸쳐 만주 대표 톈진 상업 투수로 출전했다. 지은 책으로는 『역사를 알면 더 재미있는 한국 영화』(歴史を知ればもっと面白い韓国映画, 2006), 『영화가 말해주는 쇼와사』(映画が語る昭和史, 2008) 등이 있다.

옮긴이. 양두원
KAIST에서 화학공학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다. 프로야구 원년 MBC 청룡 이래 LG 트윈스의 오랜 팬이다. 2000년대에 들어 응원하는 팀이 암흑기에 빠지자 우울한 마음을 다스리려고 스페인 축구와 고시엔(甲子園, 갑자원)을 파기 시작했다. 2010년 우연히 놀러간 고시엔에서 오키나와 대표 코난 고교의 기념비적 우승을 접한 뒤 본격적으로 팬이 되어 지금은 매년 여름 고시엔 구장에서 경기를 관람하는 게 연례행사가 됐다. 모 방송국에서 카메라 기자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