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시만즈
공중 캠프
폴리도어 레코드
1996년
사인을 받지 않는다. 사인받는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처음 연인의 손을 잡은 날처럼, 사랑하는 대상에 한 뼘 더 가까워졌다는 증명이다. 심지어 말년의 사카모토 류이치를 인터뷰하면서 내 바이닐이 아닌, 그를 사랑하는 후배가 맡긴 십여 장의 바이닐에 대신 사인을 받아 준 적도 있다. 이름이 아니라 그 시대, 그 시대 그 음악가의 입장이 담긴 음악, 그 시대 그 음악을 듣던 내가 기억하는 시간이 음악이고 사인을 받지 않는다.
한편 바이닐 애호가로서 재킷을 온전히 지키려는 내가 있다. 사인이 있는 재킷은 옷 입힌 강아지 같다. 그런데 벗길 수가 없다. 내가 사랑하는 음악에 한 뼘 더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은 그 음악을 사랑하는 이유가 된 모든 걸 경험해 보는 것이다. 피시만즈 중에서도 ‘폴리도어 시절’이라 불리는 시기의 모든 음악, 모든 매체를 듣고 봤다. 예컨대 앨범 『공중 캠프』(空中キャンプ, Kūchū Camp)는 CD로 시작해 당시 한정 발매된 바이닐(팔았다.), 『피시만즈 록 페스티벌』(Fishmans Rock Festival) 박스 세트에 포함된 바이닐, SHM-CD*로 발매된 CD까지 네 가지 버전을 경험했다. 매체를 중복해서 가지지 않는 원칙이 있지만, 예외는 점으로 찍다 선이 되곤 했다.
처음 산 『공중 캠프』 CD에는 스무 살 무렵의 내가 선명하다. CD의 읽는 면이 당시 노트에 썼던 문장처럼 어지럽게 긁혀 있다. CD 플레이어에 잘 읽히지 않아 판매할 수도 없다. 판매할 수 없는 음반을 버리지도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음반을 버려야 하는 상황이 왔다면, 인형처럼 최대한 눈을 마주하지 않고 쓰레기통에 넣었을 것이다.
아직까지 갖고 있었다기보다 아직까지 버리지 않았다. 자랑한 적도 유용한 적도 잊은 적도 없다. 더 이상 갖고 있기 힘든 현실적인 이유들과 싸웠고, 음악이라는 가치 지향적 세계를 지키고자 버텼으며, 그 끝에 언제나 버리지 않는 선택을 했다. 이게 무슨 업적은 아니다. 나는 그동안 무정한 자식, 무심한 친구, 무모한 연인이었다. 그들에게, 겨우 사인을 받느라 그 오랜 시간을 보냈다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버릴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눈을 마주하는 작별 인사를 건넬 수 있기 때문이고, 사토 신지의 사인은 더 이상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SHM-CD: Super High Material CD의 줄임말. 일반 CD보다 투명도가 높은 특수 소재로 만든 고음질 CD 포맷으로, 일본에서 개발됐다.
**피시만즈의 리더 사토 신지는 1999년 3월 15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프리랜스 에디터. 『데이즈드 앤 컨퓨즈드 코리아』(Dazed & Confused Korea)와 『지큐 코리아』(GQ Korea)에서 일했다. 음악 페스티벌 ‘서울 인기’, 잡화점 ‘우주만물’, 음악 바 ‘에코’, 온라인 음악 플랫폼 ‘버드엑스비츠’(BUDXBEATS)를 좋은 동료들과 함께 기획하고 운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