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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기 전에 듣는 음악 1: 사인 오브 더 타임스
정우영

2025년 9월 23일 게재

『버리기 전에 듣는 음악』의 일부를 연재합니다. 매주 화요일, 다섯 번의 연재 이후 단행본이 출간될 예정입니다.

피시만즈
공중 캠프
폴리도어 레코드
1996년

사인을 받지 않는다. 사인받는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처음 연인의 손을 잡은 날처럼, 사랑하는 대상에 한 뼘 더 가까워졌다는 증명이다. 심지어 말년의 사카모토 류이치를 인터뷰하면서 내 바이닐이 아닌, 그를 사랑하는 후배가 맡긴 십여 장의 바이닐에 대신 사인을 받아 준 적도 있다. 이름이 아니라 그 시대, 그 시대 그 음악가의 입장이 담긴 음악, 그 시대 그 음악을 듣던 내가 기억하는 시간이 음악이고 사인을 받지 않는다.

한편 바이닐 애호가로서 재킷을 온전히 지키려는 내가 있다. 사인이 있는 재킷은 옷 입힌 강아지 같다. 그런데 벗길 수가 없다. 내가 사랑하는 음악에 한 뼘 더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은 그 음악을 사랑하는 이유가 된 모든 걸 경험해 보는 것이다. 피시만즈 중에서도 ‘폴리도어 시절’이라 불리는 시기의 모든 음악, 모든 매체를 듣고 봤다. 예컨대 앨범 『공중 캠프』(空中キャンプ, Kūchū Camp)는 CD로 시작해 당시 한정 발매된 바이닐(팔았다.), 『피시만즈 록 페스티벌』(Fishmans Rock Festival) 박스 세트에 포함된 바이닐, SHM-CD*로 발매된 CD까지 네 가지 버전을 경험했다. 매체를 중복해서 가지지 않는 원칙이 있지만, 예외는 점으로 찍다 선이 되곤 했다.

처음 산 『공중 캠프』 CD에는 스무 살 무렵의 내가 선명하다. CD의 읽는 면이 당시 노트에 썼던 문장처럼 어지럽게 긁혀 있다. CD 플레이어에 잘 읽히지 않아 판매할 수도 없다. 판매할 수 없는 음반을 버리지도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음반을 버려야 하는 상황이 왔다면, 인형처럼 최대한 눈을 마주하지 않고 쓰레기통에 넣었을 것이다.

아직까지 갖고 있었다기보다 아직까지 버리지 않았다. 자랑한 적도 유용한 적도 잊은 적도 없다. 더 이상 갖고 있기 힘든 현실적인 이유들과 싸웠고, 음악이라는 가치 지향적 세계를 지키고자 버텼으며, 그 끝에 언제나 버리지 않는 선택을 했다. 이게 무슨 업적은 아니다. 나는 그동안 무정한 자식, 무심한 친구, 무모한 연인이었다. 그들에게, 겨우 사인을 받느라 그 오랜 시간을 보냈다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버릴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눈을 마주하는 작별 인사를 건넬 수 있기 때문이고, 사토 신지의 사인은 더 이상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SHM-CD: Super High Material CD의 줄임말. 일반 CD보다 투명도가 높은 특수 소재로 만든 고음질 CD 포맷으로, 일본에서 개발됐다.

**피시만즈의 리더 사토 신지는 1999년 3월 15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우영

프리랜스 에디터. 『데이즈드 앤 컨퓨즈드 코리아』(Dazed & Confused Korea)와 『지큐 코리아』(GQ Korea)에서 일했다. 음악 페스티벌 ‘서울 인기’, 잡화점 ‘우주만물’, 음악 바 ‘에코’, 온라인 음악 플랫폼 ‘버드엑스비츠’(BUDXBEATS)를 좋은 동료들과 함께 기획하고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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