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는 문학의 갈래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단순히 작품으로 구현되는 데 그치지 않고, 작품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적 맥락은 물론 그것을 소비하는 현상에 이르기까지 복합적인 의미를 아우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 SF를 문화적으로 정의할 때, SF가 발생하는 장(場, field)은 어디일까? SF는 다른 장르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가, 편집자, 비평가, 그리고 팬들이 합심해 일궈낸 장르이다. 셰릴 빈트는 이렇게 형성된 능동적인 활동 영역을 “실천 공동체”라고 명명하고, SF의 특징으로 정의했다.(주 1) 물론 셰릴 빈트가 말한 진정한 의미의 실천 공동체는 한국에서 20세기 후반에서야 출현했다. 하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 시작점은 1960-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 문화적 측면에서 SF를 바라볼 수 있는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났으니, 하나는 SF 작가 협회의 결성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소설 전집류의 탄생이다.
‘한국 SF 작가 협회’는 1968년 4월에 결성됐다. “SF 작가 상호 간의 연구와 친목을 도모하고 발달하는 과학과 기술의 실리를 보급시키는 한편 SF를 통하여 과학이 지닌 이상주의와 선구적인 과학사상을 추구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결성된 이 단체는, SF 작가인 서광운이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주 2) 창립회원 명단에는 과학세계사 주간이었던 지기운을 비롯해, 오민영, 강민, 강성철, 이동성, 강승언, 최규섭, 윤실, 이흥섭, 신동우, 서정철 등이 포함되었다.(주 3) 회원들의 직업은 작가뿐 아니라 편집자, 교사, 만화가 등 다양했는데, 확실한 연관성이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1963년에 발족한 ‘일본 SF 작가 클럽’(日本SF作家クラブ)을 참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단체 역시 작가, 번역가, 평론가, 편집자뿐 아니라 데즈카 오사무 같은 만화가까지 포함된 비슷한 형태였다.
‘한국 SF 작가 협회’는 ‘일본 SF 작가 클럽’과 달리 긴 시간 활동을 이어가진 못했지만 이후 한국 SF 문화의 기반을 다진 전집류 출판에 직접 관여했다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들은 1970년대 접어들면서 발간된 해동출판사의 ‘한국과학소설(S‧F)전집’과 아이디어회관의 ‘에스에프 세계 명작’에 자신들의 창작물을 실었다. 이후 진영출판사, 서영사, 아동문학사, 육영사, 훈민사 등에서 나온 SF 전집에도 이들의 작품이 포함되었지만 기존 전집에 포함된 작품과 중복되는 부분이 많았기에 1970년대의 작품 활동이 가장 주요하다고 할 수 있다.(주 4) 물론 이 시기 전집류의 발간은 시대적인 배경과 다시 맞물린다. 전집은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 사회의 교육열과 맞물려 나타난 출판 현상이었다. 그중에서도 SF가 전집류의 출판 대상으로 부상한 것은 아무래도 1960년대부터 박정희 정권이 내건 ‘과학입국’(科學立國)에 대한 국가적 차원에서의 관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주 5)
이는 구한말부터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열망하면서 가졌던 과학에 대한 선망이 해방과 전쟁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진 것이지만, 과거에는 이러한 인식이 몇몇 진보적인 담론에 밝은 이들끼리의 시도에 그쳤다면 한국전쟁 이후부터는 국가에서 좀 더 주도적이고 정책적으로 과학에 대한 필요를 역설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한국 SF 역시 새로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바로 SF의 필요성에 대해 사회적인 차원에서 요구하게 된 것이다. ‘SF의 황무지 한국’이라는 제목의 1963년도 기사는 서양의 예를 보면 “SF가 수많은 청소년들에게 과학에 대한 꿈을 불어넣어 그들을 과학자로 성장시키는 데에도 공헌을 해온 것은 사실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도 ‘한국에는 SF가 없다’는 사실은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주 6) 그러면서 SF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하는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학생과학』 등의 잡지에 SF 작품을 발표하던 서광운을 중심으로 ‘한국 SF 작가 협회’가 결성되고, 그들의 창작품이 해동출판사에서 발행한 SF 전집에 포함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해동출판사의 전집은 「황혼의 타임머신」(강민), 「북극성의 증언」(서광운), 「마의별 카리스토」(오영민), 「악마박사」(이동성), 「4차원의 전쟁」(서광운), 「텔레파시의 비밀」(김학수), 「관제탑을 폭파하라」(서광운), 「화성호는 어디에」(오영민), 「지문의 비밀」(이동성), 「우주함대의 최후」(서광운)로 구성되어 있다.(주 7) 각 책에는 당시 과학기술처 장관이었던 최형섭의 격려사와 함께 이 책이 ‘한국 SF 작가 협회’를 통해서 발간되었다는 서광운의 머리말이 실려 있다. 머리말을 보면 『학생과학』에 발표되어 독자들의 인기를 끌었던 작품들을 새로 다듬어서 내놓았다고 밝히고 있는데, 여기에는 순수 창작물뿐 아니라 강민의 「황혼의 타임머신」처럼 번안한 작품이나 다시쓰기를 한 작품도 혼재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주 8)
해동출판사의 전집 출간은 당시 SF에 대한 대중적인 수요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물론 ‘한국 SF 작가 협회’가 전문 작가들의 단체로 발전하지 못하고 아마추어 집단에 가까운 형태에 머문 채 후속 작업을 이어가거나 발전시키지 못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해동출판사의 ‘한국 과학소설(S‧F) 전집’은 이후 아이디어회관이 펴낸 ‘에스에프 세계 명작’에 10편 모두 그대로 실리면서 또 다른 방향으로 확장된다. 아이디어회관의 ‘에스에프 세계 명작’은 일본 이와사키 서점에서 1966년에 발간한 ‘에스에프 세계명작’(エスエフ世界の名作)을 기반으로 출간한 전집이다. 26권까지는 이와사키 서점 전집의 구성을 그대로 가지고 왔고, 자체 기획한 24편의 작품과 해동출판사의 전집 10편을 더해 총 60권으로 구성되었다.(주 9) 이러한 구성은 표지에서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는데, 이와사키 서점에서 발행된 작품들을 옮겨오면서 표지 역시 그대로 옮겨왔기 때문이다.(주 10)
하지만 이러한 특이한 구성 덕분에 아이디어회관의 ‘에스에프 세계 명작’은 한국 SF의 역사에서 상당히 의미 있는 지점들을 만들어 낸다. 우선 SF라는 용어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한국 사회에 장르에 대한 인식을 명확히 심어주었으며, 그동안 잡지 등을 통해서 파편적으로 소개되던 해외 SF 작가들이 대거 전집에 포함되면서 이후 한국에서 탄생한 SF 문화의 기반에 힘을 보탰다. 특히 다양한 작품들이 한꺼번에 소개되면서 SF에 대한 경험을 양적으로 확장시켰다는 점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이 시기에 소개된 SF 작가들은 휴고 건스백, 올라프 스태플든, 아이작 아시모프, 로버트 A. 하인라인, 아서 C. 클라크, E. E. 스미스와 같은 유명 SF 작가들이었다. 기존에 쥘 베른과 H. G. 웰스를 중심으로 유럽의 SF 작품들이 전해졌다면, 이 시기부터 미국에서 형성되고 발전한 장르로서의 SF 작품들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통해 유럽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과학을 둘러싼 헤게모니가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을 거치면서 미국으로 이동했음을 확인할 수 있기도 하고, 1920–30년대 소위 SF의 황금기를 거치면서 쌓인 미국 SF의 역량이 우주 시대의 시작과 함께 부각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해외의 유명 SF 작가들과 한국 작가들의 창작품이 나란히 전집을 구성했다는 점은 SF의 역사적인 맥락에서 보았을 때도 그렇고, 한국의 과학입국 담론에서 보았을 때도 상징적이다.
하지만 한국 SF 작가 협회 작가들의 작품은 대체로 이전 시대의 SF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우선 과학기술에 대한 교조적이고 장황한 설명이 지나치게 많이 등장한다. 가장 많은 작품을 쓴 서광운 역시 과학기술에 대한 작위적인 설명과 ‘과학 세미나’나 ‘국제회의’ 같은 형식을 통해 계몽적인 목적에 부합하는 글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주 11) 장황한 설명과 달리 정작 과학기술이 이야기에 미치는 영향력은 미미해서 이야기를 위한 설명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에 관한 정보를 독자, 그중에서도 아동‧청소년들에게 전달하려는 의도에 부합하기 위한 창작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구한말 번안된 소설에서부터 이어지는 한국 SF의 특징이자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서광운은 1990년대에 “SF가 한낮 과학의 계몽 수단으로 전락되던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라고 말했지만 ‘한국 SF 작가 협회’가 전집의 필자로 활동하던 1970년대의 작품들을 보면 이러한 과제들을 돌파하지는 못했던 걸로 보인다.(주 12) 게다가 ‘한국 SF 작가 협회’의 구성원이나 전집 구성에서 대표적인 SF 전문 작가로 활동했던 한낙원이나 안동민 등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도 의아한 일이다. 이들 역시 SF 장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번역부터 창작까지 모두 소화했던 인물들이었는데 이들의 활동은 ‘한국 SF 작가 협회’ 안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물론 한낙원의 경우 단행본 출간이 활발해서 굳이 전집에 자기 작품을 포함시킬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협회 활동에 일절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시기 전집류를 통해 소개된 SF 작품들이 한국 SF가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경험적 기반을 마련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비록 일종의 유행이자 교육적 목적을 가졌지만, 아동‧청소년들이 SF라는 장르에 대한 감각을 경험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후 1980년대까지 이어진 전집 출판에서 SF는 꾸준히 대중에게 노출되며 장르이자 문화로서 영역을 확장해 나갈 수 있었다. 아동문학사의 ‘소년소녀 세계공상과학’, 진영출판사의 ‘옹달샘 소년소녀 SF세계문학전집’, 훈민사의 ‘소년소녀 공상과학문학전집’, 해문출판사의 ‘팬더 SF걸작시리즈’, 서영출판사의 ‘어린이를 위한 세계 SF‧추리문학’과 같은 전집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주 13)
이런 전집 출판의 영향력은 후대의 SF 팬들이 그대로 입증해 주고 있다. 1993년에 창간된 잡지 『SF 매거진』에 실린 ‘한국 SF 작가 협회’ 회원의 인터뷰와 절판되었던 아이디어회관의 ‘에스에프 세계 명작’을 디지털 데이터로 전환하고 보존하는 ‘직지 프로젝트 1999’ 같은 작업이 대표적이다. 1999년에 시작된 ‘직지 프로젝트 1999’는 PC통신을 기반으로 형성된 팬덤을 중심으로 국내 SF 시장의 축소를 염려하며 ①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유산으로서 소장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자료를 만든다는 데 의미를 두고, ② 순수한 아마추어들이 그간 출간된 서적을 정리하여 아직 접해보지 못한 SF를 섭렵하는 계기를 마련키 위해 기획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전체 프로젝트는 정상돈이 기획을 담당했고, 다양한 SF 팬덤들이 작업에 참여했다.(주 14)
이러한 작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 1970년대부터 시작된 SF 전집 출판들은 이후 나타나게 될 한국의 첫 번째 실천 공동체의 등장에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주목할 만한 성과나 대단한 창작의 분기점, 혹은 명작을 탄생시키지는 못했을지 몰라도 한국 SF가 문화적 역량을 갖추고 하나의 장을 형성할 수 있었던 기반을 들여다본다면, 그곳에 ‘한국 SF 작가 협회’와 그들이 참여했던 과학소설 전집들이 한몫 차지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주
1. 셰릴 빈트, 『에스에프 에스프리: SF를 읽을 때 우리가 생각할 것들』, 전행선 옮김(Arte, 2019), 163 참조.
2. 소준선, 「열린 우주를 향한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 『SF 매거진』 창간호, 1993년 봄, 45–46.
3. 고장원, 『한국에서 과학소설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부크크, 2017), 120 참조.
4. 최애순, 『공상과학의 재발견: 소설과 만화로 들여다본 한국 공상과학 연대기』(서해문집, 2022), 270 참조.
5. 모희준, 「1960-70년대 ‘과학소설 전집류’ 출판에 나타난 과학입국 담론 연구」, 『우리어문연구』 65(2019): 104–105 참조.
6. 「SF의 황무지 한국」, 『조선일보』 1963년 10월 30일 자, 6면.
7. 이주성‧모희준, 「한국전쟁 이후 아동 과학소설 전집의 장르문학으로서의 가능성 연구: 해동출판사와 아이디어회관 전집을 중심으로」, 『문화와 융합』 40(4)(2018): 881–882 참조.
8. 강민, 「「황혼의 타임머신」 재수록을 허락하며」, 『문장웹진』, 2005년 5월 23일, https://munjang.or.kr/board.es?mid=a20106000000&bid=0006&list_no=3650&act=view.
9. 이와사키 서점에서 발행된 ‘에스에프 세계명작’은 1966년부터 1967년까지 발간되었고, 이후 1976년부터 1977년까지 ‘SF 어린이도서관’(SFこども図書館)이라는 제목으로 재발행되었다. 작품의 순서와 판본은 상이하나 26권의 구성과 표지화는 동일하다.
10. 아이디어회관의 ‘에스에프 세계 명작’에 대해서는 그동안 전 40권 구성이라거나, 해동출판사에서 발표된 10편 중 일부만 가져왔다는 등 제각각 상이한 정보들이 많았다. 하지만 국립중앙도서관 데이터베이스와 실물 책, 그리고 ‘에스에프 세계 명작’을 디지털 파일로 기록한 ‘직지프로젝트 1999’에 의하면 이와사키 서점의 ‘에스에프 세계 명작’ 26권과 자체적으로 기획한 24편, 해동출판사에서 발간한 ‘한국 과학소설(S‧F)전집’의 작품들이 모두 수록된 것이 맞다.
11. 이지용, 『한국 SF의 스토리텔링연구』(박사 논문, 단국대학교, 2015), 75–76 참조.
12. 소준선, 「열린 우주를 향한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 48.
13. 최애순, 『공상과학의 재발견』, 299-301 참조.
14. 프로젝트 초기에는 아이디어회관 외에도 동서추리문고, 자유추리문고, 팬더북스 등 1980년대까지 전집을 냈던 대부분의 출판사들의 책이 수집 대상이었다. ‘직지 프로젝트 1999’와 관련된 정보들은 웹사이트(https://sf.jikji.org/idea/index.html)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화 평론가, SF 연구자. 『한국 SF의 스토리텔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단국대학교 인문사회 융합인재양성 사업단의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표 저서로 『한국 SF 장르의 형성』이, 공저로는 『비주류 선언』, 『SF 프리즘』, 『인공지능이 사회를 만나면』, 『인류세 윤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