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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에서 듣는 음악 1: 문을 허공에 띄우고
김선오

2025년 6월 24일 게재

『비행기에서 듣는 음악』의 일부를 연재합니다. 매주 화요일, 다섯 번의 연재 이후 단행본이 출간될 예정입니다.

그림: 노상호

막스 리히터
허드 온 투어
유니버설 뮤직 그룹
2024년

비행기에서 나는 잘 자고 좋은 꿈을 꾼다. 지상에서의 꿈과 상공에서의 꿈은 질감과 내용의 측면에서 어떻게 다른가.

“문을 보세요, / 문이 있는 배경을 지우세요 / 문을 허공에 띄우고 그것을 그리세요”

「말로」(『세트장』, 문학과 지성사, 2022)의 첫 연은 비행기가 이륙할 무렵 꿈과 현실 사이 어딘가에서 누군가 내 귀에 속삭인 문장이었다. 안내 방송 음성을 닮은, 그러나 더욱 분절된 목소리. 들어본 듯 익숙하지만 어떤 얼굴도 떠올릴 수 없는 목소리. 입이 있어야 할 자리에 출력이 좋지 않은 스피커가 달려 있는 사람을 상상하게 하는 목소리. 그날 나는 목소리로만 이루어진 꿈을 꾸었다. 환각과 비환각의 경계에서 선명한 문장을 들었던 일도, 그 문장으로부터 쓰게 된 시도 「말로」뿐이다.

하나의 음이 파동이 아니라 물리적인 실체라면 나는 그것을 공중에 띄워 본다. 밑에서 측면에서 바라보고 만져도 본다. 끝없이 색이 변하는 비정형의 돌멩이 같은 것. 숨을 쉬듯이 반복적으로 부풀었다 구겨지는 것. 풍선처럼 구름을 향해 멀어지는 그것이 남긴 잔향을 듣는다. 사라지는 장면과 사라지는 소리가 실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같은 것? 요즘 나는 같음을 초과하는 같음이 있다는 감각에 신경을 쓰고 있다. 같다는 말에 담기지 않는 같음, 다름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름을 같음의 편린으로 여길 수 있을 만큼 넓은 크기의 같음.

같음의 장대한 풍경 속에 둥둥 떠 있는 하나의 음과 내가 있다.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우리의 흩어짐은 서로 다른 시간의 궤도를 따라 발생한다. 하나의 음은 2초 정도의, 나는 100년 정도의 시간에 걸쳐 흩어지고 있다. 음악을 들을 때 한 개의 음과 내가 다르지 않다고, 내가 그와 같은 일시적 파동이라고 생각하면 내 몸이 흐르는 음악 속 하나의 소리로 화하여 시공간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다.

그러므로 나는 누군가에게 들린다. 목소리로서가 아니라 몸으로서. 여행 중에는 나도 나를 들을 수 있다. 문을 보고, 문이 있는 배경을 지우고, 문을 허공에 띄우고 그것을 그리라는 부드러운 명령은 어쩌면 나의 목소리였을까. 내가 나를 잘 들으려고 잠의 상태를 잠시 훔쳤던 걸까. 그나저나 지워진 문의 배경은 어디로 갔을까. 비행기에서 바라본 창밖에는 오로지 배경밖에 없다. 배경으로만 이루어진 풍경으로부터 배음이 들려오는 듯하다.

김선오

시인. 199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과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한다. 시집 『나이트 사커』 『세트장』 『싱코페이션』, 산문집 『미지를 위한 루바토』 『시차 노트』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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