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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추 로버츠와 루시 스티즈와의 인터뷰
Interview with Catsou Roberts and Lucy Steeds

리암 길릭

캐추 로버츠: 당신의 활동은 하나의 형식으로서 확장된 전시 개념을 탐구할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당신의 각 전시는 독립된 프로젝트지만, 과거의 작업을 대변하는 분리된 사물들의 모음이라기보다, 매번 새로운 전시에 착수하면서 과거의 작업을 재맥락화함으로써 전시 전체를 하나의 작업으로 만들어 주니까요.

리암 길릭: 이상하게도, 나는 전시에 관해 생각하는 편이 아닙니다. 나는 건설된 세계의 기호학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합니다. 사물들을 구축하거나 덧붙이거나, 조정하거나 개조하는 언어에 대해 말입니다. 나는 ‘유레카!’ 하는 식의 뜻밖의 발견에 흥분하지 않아요. 아르놀피니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내 작업의 이면에 놓인 어떤 단일한 생각을 풀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생각이란 것이 당연히 하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전시는 내 생각들을 춤추게 하는 연속적인 과정의 일부입니다. 아르놀피니 전시에서 우리는 이른 작업들, 이전의 프로젝트로부터 나온 단서들을 혼합시켰습니다. 전시장은 보여 주고 싶은 것을 그냥 들고 오는 장소가 아니에요. 나는 작업에 변화를 주는 방법에 신경을 아주 많이 씁니다. 나는 작업을 통해 형식과 내용을 해결하도록 교육받았지만, 내 작업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 전시는 해결된 대상들을 모아 놓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작업은 다른 것보다 견고합니다. 어떤 작업은 결론을 제시하는 한편 다른 작업은 더 실험적이고 개방적입니다. 해결점의 결핍은 나에게 패티시가 아니라 작업 방식의 부산물입니다. 내가 작업하는 영역들(예를 들어 글을 쓰거나, 스크린을 디자인하는 것), 그리고 내가 일반적으로 발전시키는 생각들은 서로가 서로를 충족시킵니다. 그래서 내 전시의 모든 작품들, 또 그와 연결된 생각들은 각기 다른 단계를 보여 줍니다.

로버츠: 당신이 미술 작업과 나란히 놓는 여러 활동들은 당신 작업에서 똑같이 중요하지요. 비록 전문적인 기자나 건축가, 극작가가 되려는 망상은 없다 해도, 이런 ‘동등한 활동’에 접근하는 당신의 방식에는 일종의 헌신적인 업무 감각, 활용 감각이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당신 작업에 힘을 실어 준다고 생각합니다.

길릭: 오히려 낭만적으로 보면, 나는 미술이 다른 분야의 기술을 흉내 내지 말고 미술 자체의 중요한 문제들에 신경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작업은 어느 정도까지는 이데올로기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표현한다기보다, 어떻게 이런 입장들이 표현되거나 시각화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나를 흥미롭게 하는 영역은 두뇌 집단들의, 또는 전략, 절충, 개혁의 ‘회색 지대’입니다. 이는 사회 경제적 활동의 거대한 중간 지대로서 오랜 시간 경시당해 왔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기록하거나 재현하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건 이미 많은 작가들이 아주 잘해 오고 있으니까요. 나는 그런 영역과 연루되거나 관계를 맺고 싶습니다.

로버츠: 당신이 사용하는 작업 방식을 살펴보면, 무에서 모든 것을 창조한다기보다 기존 요소들을 잘 활용하는 측면이 있는 듯합니다. 주어진 것을 활용하는 이러한 실용성은 당신이 말하는 ‘계획’ 사유 대 ‘시나리오’ 사유에 대한 표현 같아요. 예를 들어 따로 제작하기보다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범위에서 플렉스글라스 색상을 고른다든지, 전시 공간에 이미 존재하는 건축적 요소를 활용하는 방식입니다. 다시 말해서 존재하는 상황, 그리고 거기에 주어진 바를 조사함으로써 실용적인 방식을 전략적으로 끌어냅니다.

길릭: 나는 발견된 대상을 적절한 방식으로 취하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돌이나 유리처럼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재료를 사용하는 데도 흥미가 없어요. 그러나 플렉스글라스처럼 종종 부분적으로 제작되거나 일부 마감된 재료들을 사용합니다. 나는 표면을 개조하기 위해 피복 재료나 페인트 같은 첨가제로 작업하는 게 좋습니다. 말 그대로 재료 자체는 독립적이지 않지만, 다른 것과 관계 맺으며 작동하는 재료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초기의 역동성은 나의 오랜 관심사입니다. 나무 대신 알루미늄 벽 구조를, 유리 대신 플라스틱을 사용하면서 기초적인 재료를 대체했던 순간 말입니다. 내 작업은 건설된 환경의 정치학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묘사나 기록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놀이를 하는 그 공간을 넌지시 암시하는 것입니다.

루시 스티즈: 당신이 만들었던 첫 번째 알루미늄 및 플렉스글라스 플랫폼들은 훗날 『논의의 섬/대회의장』(Discussion Island / Big Conference Centre)의 출판으로 이어지는 당신 사유의 초기 단계를 설명해 줍니다. 앞서도 작품을 만들 때 발전시킨 생각에 따라 당신 작품들이 얼마나 자주 상이한 단계의 실험 상태를 보여 주는지 말했는데요. 그렇다면 아르놀피니 전시에서 어떤 부분이 새로운 사유를 위한 실마리로서 작동하는지 말해 줄 수 있나요? 미래의 작업이 틀을 갖춰가기 시작하는 부분 말입니다.

길릭: 지금 나는 새로운 책을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동시대 사회 경제적 조건의 맥락에서 양심과 윤리적 행동에 대한 사유를 살펴보는 책이죠. 문제는 그러한 추상적인 이슈를 철학적, 경제적, 이론적, 실용적 차원에서 어떻게 다룰 수 있는지입니다. 나는 몇 가지 방법들을 나란히 시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작업의 상당수는 그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히기보다 질문과 나란히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내 작업이 심연의 아우라만 보여 주거나, 집중적인 검토가 뒷받침되지 않은 것처럼 보일 겁니다. 아르놀피니 전시 전체가 산만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내게 새로운 구조의 사고를 고심하게 해 줄 것입니다. 1층에 있는 전시장들이 내 작업과 사유의 증거를 보여준다면, 다른 층의 전시들은 생각을 발전시키는 시공간을 제공합니다.

스티즈: 새로운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이런 발상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압박으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해 왔군요. 당신 전시는 전시장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산만한 공간’을 제공할 수도 있을까요?

길릭: 나는 이것을 어떤 사유를 가능하게 만드는 환경의 창조로 봅니다. 상당히 시각적인 전시입니다. 저는 시각적 환경이 사람들의 행동과 행동 방식을 변화시킨다고 확신합니다. 북아메리카인과 베트콩이 평화 회담을 위한 협상 테이블의 모양을 두고 논쟁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는 작가 로널드 존스가 직접적으로 다룬 이슈입니다. 아르놀피니에서 열리는 전시 『혁신 필터: 가까운 과거와 가까운 미래』(Renovation Filter: Recent past and near future)는 일종의 실험실 혹은 워크숍 환경입니다. 이는 몇몇 발상들의 결합을 시험해 볼 기회를 제공합니다. 관계적인, 그리고 비교 비평적 과정들을 연습해 보는 것이지요. 저는 어떤 생각을 처방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유연하게 접근합니다. 정해진 대로 작동하는 사물들에 조정을 제안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제 작업에서 등을 돌리고 서로 대화를 한다 해도 괜찮습니다. 내 작업은 냉장고 안에 있는 전구 같은 것이에요. 그 전구는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만 작동합니다. 관람자가 없다면 그것은 미술이 아니라 다른 것, 이를테면 방에 있는 물건 같은 것이죠.

로버츠: 많이들 인용하는 『미술과 사물성』(Art and Objecthood)에서 마이클 프리드가 미니멀리즘을 논의하는 것처럼 ‘관람객 없는 작품은 미완성’이라는… 말인가요?

길릭: 말 그대로 내 작업은 활동의 배경으로 있는 편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하고 맞물리는 것에 분명히 관심을 둡니다. 나만 존재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오직 다른 사람 혹은 대상 때문에 작업하지요. 말이 나온 김에, 나는 사실 아르놀피니 건물의 기본 구조에 어떤 통합된, 위임된 형태의 조정을 가하는 작업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몇몇 오래된 작업과 진행 중인 프로젝트들을 긁어모으는 기회로 활용하기로 결정했지요. 여기서 이들은 특정한 방식으로 읽히고, 사용되고, 놀잇거리가 되기 시작합니다. 그들을 모두 모아 놓고 물러서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생각은 단지 방종이 아니라, 잠시 내 자신의 작업을 제도화하는 데 책임을 지려는 것입니다. 아르놀피니라는 제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해도 좋다고 들었지만, 나는 이것을 게임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야말로 전시장 운영을 중단하기를 원했다면, 그렇게 해도 괜찮았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내숭 떠는 놀이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과거 1968년에만 가능했던 방식으로, 즉 다니엘 뷔랭이 제도적 비평과 관계한 조건들을 갱신하기 위해 자신의 항변을 논의했던 것처럼 아르놀피니를 교란할 필요도 없습니다.

로버츠 네, 그렇죠. 제도 비평이라는 거대한 제스처의 순간은 지나갔으니까요. 수십 년 동안 박물관과 미술 기관들은 자기 반성을 고민하며 스스로 채찍질하고 있습니다.

길릭: 나는 미술 공간이 채택하는 자체 평가 전략이, 예를 들어 코카콜라의 자체 평가보다도 정교하지 못할 때 걱정스럽습니다.

스티즈: 글쎄요, 아시다시피 재개발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인 이런 특정한 시기에 아르놀피니에서 당신 전시가 열린다는 점에서 그 잠재성에 관심이 갑니다. 우리는 한창 계획하고 재평가하는 와중에 있습니다. 아주 특별한 정치적, 도시적, 디자인적 이슈들이 작동하고 있지요. 당신 작업에서 무언가 우리의 재고를 촉발하는 지점이 있나요?

길릭: 전시는 그보다 유연할 것이고 보다 잔잔할 것입니다. 나는 모호한 개념으로 작업합니다. 가르치려 들기보다는 다소 부분적이고 평행적입니다.

로버츠: 전시를 펼쳐서 가상으로 순회해 보면 어떨까요? 그러면 『혁신 필터: 가까운 과거와 가까운 미래』를 구성하는 특정한 요소들을 논의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길릭: 아래층 전시장 1의 요소들은 의도적인 복잡성을 가지고, 서로가 서로를 강화시키거나 약화시킵니다. 1층 공간은 전체로서 읽힐 수 있어요. 그것은 거의 단일한 환경일 것입니다. 저는 전시장의 모든 가설 벽면을 제거하고, 읽힐 수 있는 방식으로 공간을 인식하도록 강렬한 그래픽 요소들을 사용합니다. 동시에 관람자들이 관계할 수 있는 세부들이 있는데, 당신이 다른 작업을 등지고 서 있도록 허용할 겁니다. 작품을 보지 않는 당신을 전시실의 일부로 만드는 것이죠.

전시실에 들어서면 당신 바로 앞에는 두 개의 플렉시글라스 스크린이 있을 겁니다. 이 스크린은 원래 내가 뮌헨에 있는 어떤 은행을 위해 디자인한 것입니다. 건축가의 부주의로 문제가 많았던 죽은 공간을 내가 인식하고 그곳에 이 스크린을 설치하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이 스크린은 공간이 작동하는 방식을 미묘하게 변화시킵니다. 그렇지만 흥미롭게도 내 제안 때문에 건축가들이 건물 일부를 재고하게 되었어요. 덕분에 그 스크린을 설치할 수 없었죠. 미술의 도움 없이 그들의 디자인을 해결할 더 좋은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스티즈: 특정 장소를 위해 특별히 디자인된 스크린이 독특하게도 다른 곳에서 실현되는 셈이군요. 종이 위에서 끝나버린 이 뮌헨 작업은 ‘혁신 필터’에서 어떤 기능을 위해 설치되나요?

길릭: 네. 뻐꾸기의 알 같지요. 전시에 설치된 두 개의 벽면 다이어그램은 굉장히 아르놀피니 특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 켈트풍의 문양을 재구성한 이들 다이어그램은 두 개의 다른 크기로 재구성되어 말 그대로 망막적인 시각 효과를 만들어 냅니다. 이 효과는 전시실의 크기와 비례를 실험합니다. 스크린은 내가 만든 다른 작업과 관련하여, 관심을 두는 다양한 생각들을 발전시킵니다. 예를 들어 문양, 장식, 실험, 권력 놀이에 관한 페미니스트의 생각이나 사회구조화의 모형들과 기독교 이전 시대에 대한 나의 관심사 같은 것입니다. 표피적으로 이들 벽면 그림은 1974년 암스테르담의 스키폴 공항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합니다. 나는 기업 아이덴티티가 세상에서 강력한 존재가 되면서, 아이덴티티의 미학이 유대교와 기독교적 사고 이전과 이후의 완전한 결합인 오래된 이도교의 상징주의로 귀환했다는 사실이 좋습니다.

로버츠: 1970년대에 관해서… 당신 작업은 종종 1970년대의 미학,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관계 측면에서 논의되는데요.

길릭: 내 작업과 1970년대에 관한 오해가 있습니다. 나에게 1970년대는 히피가 다소 수그러지는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1970년대의 절반은 펑크, 쾌락주의, 혼성 모방, 자동 해체, 사물을 더 좋게 만들려는 욕망의 우울한 타락을 보여 준 시대였습니다. 전투는 승리했고, 신나게 놀 참이었던 거죠. 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무언가를 발전시키려는 때, 그러고 나서 완전히 망가지는 때에 더 관심이 갑니다. 예를 들어 전쟁 이후의 템즈미드 도시 계획, 로버트 맥나마라의 미국 방위 정책 같은 경우죠. 나아가 그러한 때와 함께하는 미학에 관심을 가집니다. 나는 미학 이면의 이데올로기를 찾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옵아트와의 명백한 관계성은 모두 오해의 소지가 있어요. 마치 마룻바닥이 여기저기 뚫린 낡은 집 안을 걸을 때 종종 발이 빠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한 구멍들이 내 작업에 많이 있어요. 관람자가 미끄러질 수 있는 인식의 공백들 말입니다.

스티즈: 아래층 갤러리 중앙에 놓인 거대한 나무 스크린은 도널드 저드 혹은 임스 부부의 작업과 약간 피상적인 유사성을 가집니다. 이에 관해서도 어쩌면 같은 말을 하겠군요.

길릭: 이 스크린은 그 전에는 한 번도 결합된 적이 없는 저의 지난 작업을 일부 중요한 제작자들과 묶어 주는 일종의 칸막이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기울어진 난간(문제를 풀기 위한 기능적인 세트로서 뚜렷한 의도가 반영된 결과물), 원고(책을 참조하는 소품), 튜브 모양의 종들이 있을 겁니다. 이 작업들은, 예를 들어 건물 디자인과 실제 주거 사이, 글쓰기와 출판 사이의 영역처럼 모두 어떤 중간 지대를 다루고 있습니다. 각 주제와 암시하는 바는 모두 다르다 해도, 모두 집중된 발상의 핵심에서 출발합니다. 그들은 어떤 분리된 역할을 지속하기 위해 디자인된 것이 아니라, 세부이자 초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보호가 필요합니다.

로버츠: 마치 그들을 이 나무 구조 뒤로 몰아넣은 것처럼 보이는군요.

길릭: 맞아요. 그들은 나머지 작업과 다른 사고방식을 보여 줍니다. 한편 위층에서 나는 전시장 2를 공간적으로 개선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켈트인들의 나선 문양을 잘라낸 것처럼 보이는 구조를 디자인했는데, 이는 관람자를 벽에서 멀리 떨어져 회전하게 합니다. 아래층의 나무 구조와 마찬가지로 미술 작품인지 아닌지 명확하지 않지만, 이 구조는 전시장의 초점입니다. 여기서 내가 디자인한 그 구조물과 거기에 걸려 있는 것들, 예를 들어 나의 평면 작업에서 기인한 평면도, 로고, 카드 디자인 같은 것들 사이의 관계성은 명료하지 않습니다. 전시장 벽을 따라가다 보면 내 책 『논의의 섬/대회의장』에 실린 이미지에 기초한 작품이 나오는데, 한 인물이 코카콜라 색의 방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장면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또한 이 전시장에는 내가 더글라스 고든, 카르텐 횔러, 필립 파레노, 피에르 위그, 리르크리트 티라바니자와 함께 만든 「비치나토 2 VICINATO 2」가 상영될 것입니다. 이 영상이 보여 주는 일종의 협업 형식은 내게 아주 중요합니다.

위층 전시장 3에서는 관람자가 작품의 중심이 됩니다. 공간은 개방되어 있고, 관람객은 과도한 내용이나 강력한 환경에 압도당하지 않을 겁니다. 여기서 휴식을 취할 수 있어요. 전시실의 차가운 회색 바닥에 놓인 미니멀한 모습의 스테레오에서는 배경음악이 흘러나오고, 천정에는 흑백의 플랫폼들이 매달려 있습니다. 미학적으로 완벽하게 고상한 집합이지요. 층을 이루는 방은 표피적으로 일관된 순간처럼 보일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작업의 이면에 관해 생각하고, 이것이 존재하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사실 이것들은 전체 전시 공간에 있어 최대의 불협화음을 내는 셈입니다.

스티즈: 당신은 자신의 생각을 시험하는 과정의 일부로서 전시에 관해 언급했고, 이제 우리는 막바지에 접어들었어요. 당신의 의사 결정 과정에 관해 말해 줄 수 있나요? 우리가 보는 최종 결과물을 어떻게 결정하나요?

길릭: 나의 모든 작업은 컴퓨터에서 생각해 낸 것입니다. 나는 아르놀피니 전시가 어떤 모습일지 99퍼센트 시각화할 수 있어요. 화면 위에서 디자인하는 것은 내가 하는 모든 작업에 영향을 끼칩니다. 하지만 방법이 분명하지는 않아요. 작업의 방법론은 공공연한 것이라기보다 내포된 것입니다. 다른 데서 알 수도 있어요. 컴퓨터에서 내가 작업할 수 있는 속도와 관련될 수도 있지요. 나는 공간을 배치하고 투사하며 계속 무언가를 시도합니다. 그것을 변경하고 패턴을 늘리고 수백 개의 색채를 넘겨 봅니다. 끊임없이 수정을 축적해 나가며 관심 있는 생각들을 연결하는 것이 나의 전략입니다.

작업과 관련해서 내가 의식하는 한 가지는, 내가 어느 정도까지 수정할 수 있을까입니다. 전시를 구성하면서 전시를 바로잡을 것들을 한두 개 덧붙이게 되겠죠. 전시의 매력은 전시를 구성하는 순간, 즉 결정이 이뤄지는 때입니다. 이것은 ‘순간 예술’입니다. 나는 항상 마지막 순간까지 즉흥적으로 전시를 수정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요.

스티즈: 그럼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할 무언가를 준비해 뒀나요?

길릭: 그건 내가 계획과 짐작이 충돌하는 지점을 찾을 수 있을지에 달려 있습니다.

© Liam Gillick

참고

리암 길릭
미술가.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 리르크리트 티라바니자 등과 함께 ‘관계 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며, 영국 현대미술 부흥기를 주도한 ‘영국의 젊은 미술가들’ 초기 작가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조각과 설치 등을 비롯해 건축, 영화, 그래픽 디자인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활발히 활동해 왔으며 2009년 영국인으로서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 대표작가로 선정돼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런던 화이트채플 갤러리(2002), 뉴욕 현대미술관(2003), 파리 팔레 드 도쿄(2005), 취리히 쿤스트할레(2006)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2008–2010년에는 스위스, 독일, 미국 등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