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투안 볼로딘의 『미미한 천사들』이 나왔을 때, 난 소설가 정지돈이 필명으로 쓴 책인 줄 알았다. 당시 책을 번역했던 이충민 역시 듀나 게시판 시절 ‘autecure’라는 아이디로 활동했던 기억이 나기도 했고, 책을 읽으며 정지돈의 소설이 강하게 생각나, 볼로딘 선집 한국어판이 계속 출간되는데도 그런 의혹을 지울 수 없었던 적이 있었다. 게다가 볼로딘의 이명은 루츠 바스만, 마리아 슈라그, 이리나 고바야시, 리타 후, 잉그리드 보겔 등 여러 가지인 탓에 그 의혹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물론 그건 내가 심각한 편집증(병원에서는 전두엽에 전류를 흘려보내는 1960년대식 전기 충격 치료를 권했다)을 가지고 있어서 그럴 수 있다. 『도미노』 1권에서 존 로스의 글을 보고는, 그 글이 당시 카투사에서 복무하던 노정태의 글이 아닌지 의심한 적이 있다. 여전히 나는 우리 중 누군가가 볼로딘의 실제 존재가 아닐지 의심한다. 볼로딘은 아마 나처럼 순진하고 편집증적인 독자를 이상적 독자로 상정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가 사기꾼이라면 당연히 이런 속임수 앞에서 달아나야 하겠지만, 이것이 작가의 게임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속아 넘어간다.
볼로딘의 세계에서, 이름은 조어처럼 작동한다. 한국에 소개된 볼로딘의 책이 번역서임을 감안한다 해도 이들의 이름은 이물감 있게, 어색하게 들린다. 이를테면 『작가들』에서의 브루노 하차투리안. 나는 살면서 이런 이름을 들어 본 적 없다(실제로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있다면, 죄송합니다).
볼로딘의 작명법은 그가 주창한 포스트엑조티시즘의 원칙에 의거한 것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주변’과 ‘중심’의 경계를 파괴하고 싶다는, 허풍선이적이고 정치적인 수사를 사용한다. 그럼에도 이 말도 그르지는 않다. 그가 ‘주변’으로 범주화할 수 있는 다양한 이름을 활용하기 때문이다(고려인, 키르기스스탄인, 러시아인 등). 하지만 나는 그가 표방하는 정치성을 대단히 미심쩍게 생각한다. 소비에트의 꿈들이 파괴된 뒤에도 남은 잔해는 혁명적 잠재력을 가졌다 한들 얼마간은 물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볼로딘에게 이름은 그런 물신 중 하나다. 다시 말해,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러시아–키르기스스탄–중앙아시아의 이름들은 볼로딘의 말처럼 주변에 대한 조명이긴 하겠지만, 그 이름으로부터 유래되는 이미지를 강력하게 환기한다. 하지만 이것이 페티시라 해도 어쩌겠나? 모든 사물은 우리의 욕구에 부합되는 방식으로 재구성되기 마련이다.
이름은 감옥이다, 목소리는 꿈이다
모종의 악취에도 불구하고, 볼로딘이 이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방식에는 페티시로는 완전히 환원될 수 없는 지점이 존재한다. 이를 위해서는 볼로딘이 ‘감옥’을 언급하는 대목을 짚어야 한다. 한 인터뷰에서 볼로딘은 감옥을 상상의 장소이자 문학적 장치로 활용했다고 말한다. 그의 소설에서 수용소와 정신병원 같은 집단적 공간은 말 그대로 이름을 담아 놓는 장소다. 혁명에 실패한 수많은 이들의 이름이 수감되어 판결을 기다리는 곳. 여기서 나의 진짜 이름은 과거의 것이 될 테다. 혹은 미래의 것으로서 항상 도래해야 할 꿈에 가깝다. 이곳에서 이름은 볼로딘에게 혁명적 총력전이 벌어지는 지점에 가깝다(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총력전이 언제나 꿈의 총력전이라는 점은 정확히 언급되어야 한다).
나는 한때 감옥에서 꾸는 꿈을 조사하려고 준비했다. 김동원의 영화 「송환」을 보고 나서, 장기수들이 꾸는 꿈을 조사하고 싶었다. 그들은 꿈속에서 오로지 회색 벽과, 범죄자들과 어울리는 꿈을 꿀까? 아니면 오래전 과거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그들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걸까?
위대한 소설가 샬라모프의 『콜리마 이야기』를 읽다 보면, 수용소란 정말 시간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정지된 장소처럼 보인다. 수용소에서 모든 인간은 꿈이 없는 채로 산다.
그는 감옥에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감옥의 인간은 비열한 인간과 덜 비열한 인간으로 나뉜다고 말한 바 있다. 『콜리마 이야기』에서 인간은 현상 유지 혹은 생존을 위한 유기체일 뿐이다. 이를테면 『콜리마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먹는 일과 몸을 따듯하게 보온하는 일이다. 즉, 『콜리마 이야기』에서는 물질적 변화를 중심으로 세계가 돈다. 샬라모프는 진정한 유물론자다. 그는 인간을 ‘정신’으로 구별하지 않는다.
“세상은 선인과 악인으로 나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비겁자와 비(非)비겁자로 나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겁자의 95퍼센트는 아주 가벼운 위협 앞에서도 가장 비열하고 치명적인 짓을 저지를 수 있다.” [*] “I discovered that the world should be divided not into good and bad people but into cowards and non-cowards. Ninety-five percent of cowards are capable of the vilest things, lethal things, at the mildest threat.” 바를람 샬라모프(Varlam Shalamov), 「내가 굴라크에서 배운 마흔다섯 가지 일(Forty-Five Things I Learned in the Gulag)」, 『파리 리뷰(The Paris Review)』, 2018년 6월 12일, https://www.theparisreview.org/blog/2018/06/12/forty-five-things-i-learned-in-the-gulag/ (2026년 3월 3일 최종 접속).
더 나아가 샬리모프가 경험한 소련의 강제 노동 수용소 ‘굴라크’의 세계에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취급받는 모습은 정신이 취급받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그 세계에서 잭 런던을 숭배하는 사람을 만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프루스트라니? 그건 카드 만드는 데나 쓰일 뿐이다. 크고 무거운 판형의 책이니까. (…) 카드가 된다, 카드가…. 잘려 나가고 그게 끝이다.” [*] “You might meet admirers of Jack London in that world, but Proust? It could only be used to make playing cards: it was a heavyweight large format book. […] It went to make cards, cards … It would be cut up and that was it.” 패트릭 커프(Patrick Kurp), 「잔혹한 러시아 인형—바를람 샬라모프의 『범죄 세계의 하늘—또 다른 콜리마 이야기』에 대해(A Set of Vicious Russian Nesting Dolls: On Varlam Shalamov’s “Sketches of the Criminal World: Further Kolyma Stories”)」, 『로스앤젤레스 리뷰 오브 북스(Los Angeles Review of Books)』, 2020년 4월 21일, https://lareviewofbooks.org/article/a-set-of-vicious-russian-nesting-dolls-on-varlam-shalamovs-sketches-of-the-criminal-world-further-kolyma-stories/ (2026년 3월 3일 최종 접속). 꿈이란 건 감옥에서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책은 카드가 된다. 책은 불태워진다. 책은 불태워지면서, 물질적 변화에 의거해서만 의미를 가진다. 굴라크에서 모든 것은 온도와 질량, 에너지로 환원될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감옥이라는 환경이, 강제적이고 집단적인 서식지로서 감옥이 그들에게 꿈을 꾸게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추론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과장을 보태면 정신 속에도 물질적 변화가 일어나며, 그 증거가 바로 꿈이기 때문이다. 어제의 모든 질료가 오늘 꿈에서 정신으로 재탄생한다.
나는 샬라모프보다는 볼로딘의 주장과 더 친밀하게 관계한다. 남한은 감옥의 나라다(비유적으로도 그렇고, 실제로도 그렇다). 1970년대 반공주의자들이 간첩 조작 사건으로 투옥시킨 재일 조선인들은 그 희생자였다. 서준식은 형 서승과 함께 ‘재일교포유학생간첩단사건’에 의해 장장 17년간 투옥되었다. 그는 전향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보존했다. 나는 이 경이로운 인내심을 보며 꿈, 혹은 마음의 산맥이 존재하지 않는 한, 그 싸움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10년 전, 나는 비전향 장기수 서준식 선생에 대한 인터뷰를 준비하며 아래 질문을 떠올렸다.
1) 투옥 당시 꾸었던 꿈 중 기억에 남는 꿈이 있는가?
2) 투옥 당시 반복적으로 꾸었던 꿈이 있는가?
3) 꿈에서 감옥이 나올 때가 있었는가? 있었다면 어떤 모습이었는가?
4) 트라우마적인 사건이 있었나? 그 사건이 꿈에서 재현된 적이 있었는가?
서준석 선생의 서한집에서 보건대, 아쉽게도 그에게 꿈은 미약하며 주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건 아마 전향을 거부하는 그의 신념 때문일 것이다. 그의 꿈은 단단한 신념이지, 폭발하는 망상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적 유물론이 그의 망상이 뻗어 나갈 일을 원천 봉쇄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루이오귀스트 블랑키의 경우는 다르다. 프랑스의 혁명가이자 음모가인 루이오귀스트 블랑키는 파리코뮌 진압 이후, 모를레 해안 인근의 토로 요새에 투옥되었다. 투옥 중 그는 『별들에 따른 영원성』이라는 우주론을 주창한다. 그에게 우주는 무한히 반복되는 시뮬레이션들의 경합이다. 블랑키는 인류의 과거가 10억 개의 형제 행성에서 반복된다는 평행 우주론을 설파한다. 그에게 있어, 모든 외계의 행성, 즉 평행 우주(블랑키는 ‘형제-우주’라고 부른다)는 무한히 같은 장면을 반복하고 연기한다. 터무니없는 것들, 수십억 개의 꿈들에서 펼쳐지는 과거는 또 다른 행성에서 반복되고 만다. “현재 우리 행성의 전 생애는,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범죄와 불행을 포함한 채, 무수한 형제 행성들 위에서 날마다 조금씩 펼쳐진다.” [*] “At present, the entire life of our planet, from its birth to its death, with all its crimes and misfortunes, unfolds bit by bit, day by day, on myriads of brother-planets.” 루이오귀스트 블랑키(Louis-Auguste Blanqui), 「별들에 따른 영원성(Eternity by the Stars [L’Éternité par les astres])」(1872), 『블랑키 아카이브(The Blanqui Archive)』, 킹스턴 대학교(Kingston University), https://blanqui.kingston.ac.uk/texts/eternity-by-the-stars-1872/?utm_source=chatgpt.com (2026년 3월 3일 최종 접속). 블랑키는 사면(四面)의 감방 안에서 이상한 꿈을 꾼다. 그는 인생 대부분(33년)을 감옥에서 보냈지만, 그의 글에는 투옥 시간은 비교도 안 될 영원성이 자리한다. 볼로딘에게 그 영원성은 사라진 소비에트 제국의 폐허에서 발견된다. 인류의 진보를 위한 꿈은 영원히 이어진다.
절대적 어둠과 두개골 밑의 불씨
볼로딘 소설에서 가장 큰 싸움의 줄기는 이름과 목소리 사이에서 벌어진다. ‘바르도’라는 중간계를 탐사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자(『바르도 오어 낫 바르도』는 다른 작품에 비해 훨씬 더 장르 소설적인 문법과 난도를 자랑하는데, 특히 「글루첸코」 파트는 커트 보니것적인 이상한 유머 감각을 갖고 있다). 이곳은 볼로딘이 말한 “절대적인 어둠”의 세계다(『작가들』에 부록으로 실린 인터뷰에서 그는 어둠이 소설의 장면을 발생시키는 주요한 계기라고 설명한다). [*] 다수의 장면이 어둠 속, 그게 아니라면 절대적인 어둠 속에서 발생합니다.” 앙투안 볼로딘, 『작가들』, 조재룡 옮김, 워크룸 프레스, 2024, 178쪽. 주인공 ‘나’는 티베트 불교에서 중간계라고 부르는 바르도를 떠돌아다니는 혼령(?) 글루첸코의 모습을 취재한다. 그 공간에서 중요한 건 어둠이다. 어둠은 그들의 움직임을 제약하는 듯 보이면서도, 움직임의 방향성을 사방으로 열어 둔다. 그가 묘사하는 어둠은 “정확히 말하면, 풍경도 없고, 이미지도 없지만, 배경을 상상하려 애써 보면, 우리가 광활하고 검은 평원 한가운데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앙투안 볼로딘, 『바르도 오어 낫 바르도』, 조재룡 옮김, 워크룸 프레스, 2025, 142쪽.
글루첸코에게 명령하는 모종의 목소리는 신경증적 종교 집단(티베트 불교의 제관들)의 목소리다. 어둠에 이어 길을 헤맬 수 있게, 오직 목소리가 이름을 이끈다. 그건 꿈인가? 두개골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목소리는 이름이 지닌 개인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주체성과는 달리, 언제나 집단적이다. 볼로딘에게 저 집단적 꿈이란 문학의 최종적 주제이자 과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볼로딘은 소설을 비개인적 작법으로, 곧 집단적 창작물로 바라본다. 그가 말하는 나라(narrat)나 로망스(romånce)는 개인이 스스로의 상상을 투여해 창작한 문학이라기보다는, 세대로 전승해 오며 불가피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형식에 가깝다.
『작가들』은 보다 부차적으로 여겨지는 문학 형식을 의도적으로 취한다. 그건 소설이 아니고, 이야기도 아니다. 소설이 되기 전의 퇴화된 언어들, 문학을 지탱하는 하부 구조, 언어와 이야기의 파편들이야말로 볼로딘에게는 문학이다. 나는 이것들이 일종의 거대한 데모 같다고 느낀다. 이를테면 얽히고설킨 이야기들. 어떨 때 볼로딘의 소설은 분명 완성도 높은 문학 같으면서도, 동시에 정말 형편없는 완성도를 의도적으로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품의 질은 어떤 중요성도 띠지 않는다. 오직 목소리만이 중요하다. “똑같은 방식으로 모든 등장인물을 부르는 작가” [*] 볼로딘, 『작가들』, 92쪽. 라는 구절이 아이디어를 압축해서 보여 준다. 『작가들』의 「보그단 타라셰프의 작품 속 침묵의 전략」(『작가들』은 볼로딘이 쓴 작품 중 가장 보르헤스적인 작품일 것이다)에서 타라셰프는 문학적 삶의 하층에 위치한 운터멘쉬로, 볼로딘이 말하는 “쓰레기 문학” [*] 볼로딘, 『작가들』, 172쪽. 을 구현하는 핵심적 형상이다. 그는 이름이 비슷한 등장인물만 등장시킨다. 볼프, 보올프, 블라프 등등. 앞서 말한 대로 그들은 서로 구별되지 않는 비슷한 목소리로 떠들어 댄다.
타라셰프는 엄청난 작가가 아니며, 그렇다고 완벽한 무명도 아니다. 그는 특정한 미적 전략으로 환원 가능한 비평적 표본으로 등극한다. 말하자면 그는 “군소 작가” [*] 볼로딘, 『작가들』, 92쪽. 다. 이 장에서 볼로딘은 작가야말로 이름과 목소리의 총력전이 벌어지는 전장인 것처럼 다룬다. 문학 제도 속에서 작가는 자유주의적 개인으로 등록된다. 작가의 삶은 커리어다. 반면 그는 목소리를 부려야 한다. 그가 좋아하는 샤먼들처럼, 집단적으로 계승되어 온 목소리의 형식으로 삶이 작가를 침입한다.
이명을 활용하는 볼로딘에게 이 싸움은 딜레마다. 이명을 활용하는 모든 작가가 그랬듯, 그는 결국 중년의 프랑스 남자(혹은 내가 정지돈으로 의심하던 또 다른 작가)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가 추구하는 탈출구는 광기에 존재한다. 광기는 절대로 풀 수 없는 암호다. 우리의 두개골에는 최종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는다. 볼로딘이 『작가들』의 「시자카기」 속 한 챕터를 할애해 말하는 것은 개별성과 목소리가 합일되는 일종의 착란적 순간이다. 이해하기 힘든 인물들의 과거, 평행 우주와 별들의 폭발, 외계인, 비밀 지령이 나오는 부분을 즐겁게 읽어 나가다, 인물들이 특수정신과에서 탈출하는 뒷부분이 내 이야기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브루노 하차투리안, 그 독특하고 괴상한 이름의 사람이 경험한 전기 충격 치료는 내가 경험한 고전적 전기치료와 유사하다. 볼로딘은 이렇게 쓴다. “그의 이름은 브루노 하차투리안이다. 그의 두개골에는 전기 충격의 자국이 선명하게 보인다.” [*] 볼로딘, 『작가들』, 44쪽. 전두부에 전류를 흘려보낼 수 있는 전극을 부착해 전신에 경련을 일으킨다. 그러면 온몸은 지진이 난 듯 흔들리고, 정신은 희미해진다. 하차투리안이 경험했을, 그리고 내가 경험한 전기 충격은, 우리의 두개골 밑에 불씨를 당긴다. [*] “두개골 밑에 불씨가 남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볼로딘, 『작가들』, 42쪽. 그러면 볼로딘, 정지돈, 노정태, 존 로스, 루츠 바스만, 페르난두 페소아, 브루노 하차투리안, 이들 모두는 우리의 두개골 안에서 서로 섞이고, 떠들어 댄다. 그리고 당신의 목소리, 절대적인 어둠과 같은 허무가 찾아온다. 그다음엔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공간이 검다. 치료는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볼로딘을 볼로딘으로 보지 못하겠다. 내게 여전히 그는 모든 행성과 목소리, 꿈을 잇기 위한 단자처럼 보일 뿐이다. 그래서 내가 그레타와 사랑에 빠진 하차투리안이거나, 어쩌면 그의 모험을 써 내려가는 볼로딘의 혁명적 손이라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 내 편집증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볼로딘의 꿈속에서 혹은 내 편집증 속에서 우리 모두는 두개골 밑의 불씨다, 절대적 어둠이다.
사회적 진보와 해방적 인문학을 말해 온 책을 몇 권 냈다. 예술 단체 ‘모든 미적 열망은 사랑으로 번역되어야 한다’의 일원이다.
예술적 실천과 정치적 투쟁, 그리고 삶의 윤리적 공존을 모색한다. 마포구에서 거북이 스물일곱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