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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에서 듣는 음악 3: 작은 현실과 더 작은 현실
김선오

2025년 7월 8일 게재

『비행기에서 듣는 음악』의 일부를 연재합니다. 매주 화요일, 다섯 번의 연재 이후 단행본이 출간될 예정입니다.

그림: 노상호

프리드리히 위르겐손
오디오스코픽 리서치 스튜디오로부터
패러사이킥 어쿠스틱 리서치 쿠퍼레티브, 애쉬 인터내셔널
2018년

화가이자 오페라 가수였던 프리드리히 위르겐손(Friedrich Jürgenson)은 1957년 자신의 보컬을 녹음하기 위해 테이프리코더를 구입했다. 이후 그는 정원에서 새소리를 녹음하던 중 자신의 별명을 부르는 죽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프리델, 내 말 들리니? 엄마야.”

그는 다른 차원의 목소리들을 채집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위르겐손은 열 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했으며 마이크, 테이프리코더, 라디오를 연결하여 스웨덴어, 독일어, 러시아어, 영어 등 다양한 언어로 들려오는 죽은 이들의 목소리와 실시간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중 하나의 목소리가 조언한 대로 그는 수신 주파수를 1445킬로헤르츠에서 1500킬로헤르츠 사이로 고정시켜 망자들의 목소리를 녹음했다. 1987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집에는 죽은 이들의 진술을 필사한 셀 수 없이 많은 노트와 수백 개의 녹음 테이프가 남아 있었다.

죽음이 소멸의 사건이 아니라 존재의 양태를 변화시킬 뿐이라면 육체를 벗어난 목소리가 파동의 형태로, 청각적으로 포획 가능한 대상으로 현전한다는 사실은—당대에 신비주의가 유행했다는 사실 때문에 의구심을 갖더라도—충분히 수긍 가능한 가설이다. 정원에 쪼그려 앉아 아침부터 밤까지 죽은 자들과의 대화를 시도한 위르겐손에게 삶은 어쩌면 거추장스러운 상태였을 것이다. 망자들의 목소리가 산 자의 몸을 중심으로 모여드는 공간에서 존재와 비존재는 서로를 넘나들고 존재의 시간은 거의 무한으로 확장된다. 위르겐손은 1987년 세상을 떠났다. 지금쯤 그의 정원에서 라디오 주파수를 1500킬로헤르츠로 고정시켜 본다면 위르겐손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올지도 모르겠다.

『오디오스코픽 리서치 스튜디오로부터』(From the Studio for Audioscopic Research)는 전자 음성 현상(EVP)의 선구자였던 위르겐손의 녹음물을 집대성한 음반이다. 위르겐손이 직접 녹음한 테이프를 재생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때로는 테이프를 거꾸로 재생하거나 속도를 조절해서 독특한 음향을 만들어 낸다. EVP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리처드 디 산토(Richard di Santo)는 음반 리뷰에 이렇게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야는 여전히 흥미로운 연구 영역이며, 최소한 일정 주목을 받을 가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소리들이 실제로 저 너머에서 온 목소리이든 아니든 간에, 그것들은 존재합니다. 진실이든 아니든.” 그의 말처럼 진실과 무관한 존재가 있다면 진실은 협소한 장소다. 우리가 현실이라 부르는 현실, 삶이라 부르는 삶 또한.

김선오

시인. 199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과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한다. 시집 『나이트 사커』 『세트장』 『싱코페이션』, 산문집 『미지를 위한 루바토』 『시차 노트』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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