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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SF 연대기 4: 「인조노동자」와 헬레나의 시간
이지용

2024년 8월 6일 게재

‘한국 SF 연대기’는 격주마다 연재됩니다.

이제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로봇’(Robot)은 SF로부터 비롯한 조어다. 그리고 그 단어가 처음 사용된 카렐 차페크의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Rossum’s Universal Robots; R.U.R., 1920)은 원작이 발표된 지 불과 5년 만에 박영희에 의해 ‘인조노동자’(人造勞働者)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소개된다. 『철세계』(1908)가 금서 조치를 당하고, 대중 소설이라는 명분으로 「비행선」(1912)이 발표된 지 무려 10여 년이나 더 지나서 소개된 작품은 당시 일본을 비롯해 세계적인 유명세를 구가하던 허버트 조지 웰스의 작품이 아니라 특이하게도 체코 작가 카렐 차페크의 『R.U.R.』이었던 것이다.

도판 1. 뉴욕 시어터 길드의 「R.U.R.」 공연 중 2막 ‘로봇들의 반란’ 장면(1928–1929). 무대 디자인: 리 시몬슨, 의상: 케이트 드레인 로슨, 사진: 밴담. 출처: 뉴욕 공공도서관.

물론 『R.U.R.』 역시 세계적으로 돌풍을 일으킨 작품이었다. 희곡으로 쓰인 이 작품은 1921년 체코에서 초연되자마자 성공을 거두며 차페크를 체코 최고의 극작가 반열에 올려놓았고, 그 명성을 토대로 이듬해 뉴욕과 런던에 진출했다. 그리고 진출한 해 뉴욕에서만 184회 연속 공연될 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극의 성공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후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었다.(주 1)

이러한 유명세 덕분에 이 작품은 일본에서도 무대에 올려졌고, 당시 한국 지식인들과 일본에서 유학하던 학생들 또한 이를 관람했던 것으로 보인다.(주 2) 이로 미루어 볼 때 『R.U.R.』이 1920년대 전 세계적으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작품임은 틀림없다. 그리고 그 관심은 한국에서도 제법 활발하게 나타났다. 극을 처음 한국에 소개한 것은 이광수였다. 그는 작품의 내용을 요약해 소개하면서 “기계적 문명에 노예가 되며 마츰내 멸망하는 날을 묘사한 심각한 풍자극”이라고 소개했다.(주 3) 이를 현대의 SF 장르적 단어들로 치환하면 과학기술에 대한 낙관적 미래 예상인 테크노필리아(technophilia)를 꿈꿨으나, 그로 인해 맞이하게 된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그린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R.U.R.』의 주제를 정확하게 짚어 낸 것이었다.

도판 2. 『개벽』에 연재된 박영희의 「인조노동자」

이와 같은 관심 속에 박영희가 번역한 「인조노동자」는 1925년 2월 1일 발간된 『개벽』 56호부터 같은 해 5월 1일 발간된 59호까지 총 4회에 걸쳐 연재되었다.(주 4) 서막과 1–3막으로 구성된 원작과 달리 번역본은 서막을 따로 나누지 않고 1–4막으로 통합된 구성을 취하고 있다. 이는 박영희가 뉴욕과 런던에서 무대에 올려진 극본을 대조하여 번역한 스즈키 젠타로의 『로봇』(ロボット, 1924)을 참고하여 옮겼기 때문으로 보인다.(주 5)

그런데 여기까지 정리하고 나니 궁금증이 하나 생긴다. 박영희는 왜 제목을 원작 그대로인 ‘R.U.R.’이나, 스즈키 젠타로처럼 ‘로봇’이 아니라 ‘인조노동자’라고 번역했을까?(주 6) 사소한 것 같지만 바로 이러한 제목 선정에서 우리는 원작이 발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이 작품이 한글로 번역되어, 당시 가장 활발하게 발간되던 잡지에 수록된 이유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우선 박영희는 연재 서문에서 ‘로봇’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로뽀트’는 ‘노동자’ 혹은 ‘무임노동자’란 말이며 또 막코안 씨는 ‘기계가 만들어서 생명을 주는 노동자’라고 해석한다. 이 말은 보헴미아어다.”

여기서 ‘노동자’ 혹은 ‘무임노동자’는 차페크가 만들어 낸 로봇이란 단어가 ‘노동’ 혹은 ‘부역’을 뜻하는 체코어 ‘robota’에서 파생되었음을 감안하면 본질에 가까운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렇게 서문에서 뜻을 설명할 것이라면 ‘로봇’ 혹은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이라는 원제를 그대로 옮기지 않고 왜 굳이 우리말로 풀어서 의미를 부여했는지 의문이 중첩된다. 일본어 번역본들이 ‘로봇’이란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거나 한자어 ‘인조인간’(人造人間)으로 번역했음을 감안하면 의구심은 더욱 가중된다.

로봇이 모사한 대상을 단순히 ‘인간’이 아닌 ‘노동자’로 번역한 것은 일견 단어가 가진 함의를 정확하게 파악한 것 같지만, 박영희가 카프(KAPF,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에서 활동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대입해 보면 당시 활발히 일어나던 사회주의 운동과 연결해 해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즉 로봇을 탄생시킨 배경인 ‘과학’에 대해 사회주의가 취한 입장을 보면 박영희가 로봇을 어떤 시각에서 해석했는지 추측해 볼 수 있다.

“유물사관과 잉여 가치로 자본주의적 생산이 지니는 비밀을 폭로한 것은 마르크스의 공적이다. 이 발견으로 사회주의는 하나의 과학이 되었다.”(주 7)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기존 자본주의 시스템에 내재한 부조리를 들춰냈고, 그로 인해 사회주의 자체가 세계의 비밀을 이해하는 하나의 거대한 방법론이 되었다고 의미를 부여한다. 과학을 단순히 기술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고 세계를 구성하는 방법론으로 의미를 확장하면, 사회주의는 큰 의미에서 과학에 부합하는 사상이 된다. 즉 사회주의자들에게 과학은 세계를 해석하고 기존 세계가 가진 불합리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도구로서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다.

도판 3. 헬레나는 갈 박사에게 로봇들이 영혼을 가지게 해 달라고 요구한다. 시어터 길드, 「R.U.R.」 공연 스틸(1928). 사진: 밴담. 출처: 뉴욕 공공도서관.
도판 4. 헬레나(왼쪽)와 도민(오른쪽). 시어터 길드, 「R.U.R.」 공연 스틸(1928). 사진: 밴담. 출처: 뉴욕 공공도서관.

이러한 맥락에서 박영희는 인간이 창조한 피조물인 로봇을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해 성찰하려던 것이 아니라, 당시 무권계급(無㩲階級)과 유권계급(有㩲階級) 사이의 부조리를 지적하고 이를 파훼하기 위한 혁명의 필요성을 계몽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로봇을 무권계급으로, 인간을 유권계급으로 해석하면 로봇들의 항거는 무권계급으로 전락한 노동자들이 부조리한 제도를 깨부수는 형멱적 행동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진다.(주 8)

작품에서 무권계급으로 상징되는 로봇의 처지를 살피고, 그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헬레나는 박영희에게 단순히 이야기를 이끌고 문제를 촉발하는 문제적 인물을 넘어 혁명을 주도하며 이야기 전체의 메시지를 견인하는 매력적인 인물로 비쳤을 것이다. 로봇들만 남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특정 인간을 모델 삼아 만들어진 헬레나(작품에서는 인간 헬레나와 그를 모방해 만들어진 로봇 헬레나가 등장한다)가 인간의 틀을 그대로 답습하는 로봇들의 세상을 떠나 새로운 세상을 여는, 마치 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처럼 상징되는 것은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이러한 박영희의 해석 때문인지 「인조노동자」에서는 원작과 다른 부분이 하나 발견되는데, 이는 꽤나 흥미로운 지점을 시사한다. 원작에서 헬레나는 로봇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기 위해 로숨 유니버설 로봇에 왔다가 도민과 결혼하여 10년이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러한 설정이 서막에 나오고, 1막이 시작하면서 결혼한 지 10년이 지났다는 사실이 언급된다.

“헬레나: 해리, 오늘이, 무슨… 날이에요?
도민: 맞춰 봐요.
헬레나: 내 생일? 아냐! 무슨 경축일?
도민: 그것보다 더 좋은 날이오.
헬레나: 정말 모르겠어. 빨리 얘기해 줘요.
도민: 당신이 이곳에 온 지 딱 10년째 되는 날.
헬레나: 벌써 10년이나 됐어요? 바로 오늘이?”(주 9)

로봇들에게 닥친 불합리한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일종의 잠입을 시도한 헬레나의 초반 설정과 그가 보여 주는 로봇들에 대한 감정 이입을 감안할 때, 그가 아무런 성과 없이(물론 헬레나의 끈질긴 요구로 인해 갈 박사가 로봇들에게 감정이 생기게 한 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지만) 10년이란 시간을 도민을 비롯한 로숨 유니버설 로봇의 일행과 보낸 것은 다소 의아한 부분이다. 물론 이는 갈 박사가 로봇에게 감정을 불어넣는 실험을 진척하기 위한 시간 설정으로 보인다. 하지만 작품을 통해 부당한 세계의 구조를 반박하는 것이 중요했던 박영희는 이러한 시간 설정에 변화를 준다.

“(떠민이 드러왓다)
헤레나: 그런데 이 꼿은 웬 것이예요?
떠민: 어듸 마처보면 용하지.
헤레나: 글세. 그러치만 내 생일날도 안인데.
떠민: 그보다 더 조흔 일이 잇지.
헤레나: 나는 몰으겟서요. 말슴해 주세요. 네.
떠민: 헤레나가 여긔 온지가 오날이 5년 되는 날이란 말야.
헤레나: 5년? 오날이? 아이걀, 참!”(주 10)

박영희는 「인조노동자」에서 헬레나가 로숨 유니버설 로봇에서 떠민(도민)과 지낸 시간을 10년이 아닌 5년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는 박영희가 참고했다고 여겨지는 스즈키 젠타로의 번역본이나, 스즈키 젠타로가 참고한 런던과 뉴욕의 공연 대본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독특한 변화다. 그가 생각하기에 로봇을 해방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헬레나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10년이란 긴 시간을 도민 일행과 지냈다는 것은 부적합한 설정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원작에서 로봇에게 영혼을 불어넣는 실험에 소요되는 10년이라는 물리적인 시간을 무시하고 5년으로 단축한 것은 아니었을까?

우선 박영희가 헬레나에 부여한 의미들은 그가 이후에 발표한 글들을 보면 더 확연해진다. 그는 1926년 잡지에 「인조인간에 나타난 여성」이라는 글을 기고하는데, 이 글은 「인조노동자」에 대한 자신만의 에필로그 형식을 취하고 있다.(주 11) 박영희는 스스로 이 글을 쓴 목적이 “인류운동의 녀성 소개”라고 밝히면서 헬레나를 언급한다. 특히 “인류 행복을 위해 학대밧는 인조로동쟈의 해방을 위해 아름답게 희생되고 말엇다. 그럼으로 헤레나의 아름다운 생명의 힘은 살엇다”라는 대목은 박영희가 이 작품을 어떤 목적에서 번역했는지, 그리고 이를 위해 헬레나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지 잘 드러낸다. 때문에 원작에서 감성적이고 충동적인 (인간의 특징이 극대화된) 면모가 강조된 헬레나가 박영희의 작품에서는 치밀한 계획성을 가진 여성 운동가로 변모한다.(주 12) 박영희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헬레나가 “오 년 동안에 그 회사의 모든 비밀과 인조로동쟈를 만드는 법까지 알려고 하엿다”, “헤레나는 오 년 동안이나 정이 든 떠민보다는 인류 전톄의 행복을 위하여 학대밧는 인조로동자의 해방을 위해서만 그는 그의 몸을 희생하려 하엿다”고 이야기한다.(주 13) 이 정도면 그가 왜 이 작품을 번역했는지, 그리고 헬레나의 시간을 10년에서 5년으로 단축한 의도는 무엇이었는지가 제법 자명해 보인다.

물론 당시 카렐 차페크의 『R.U.R.』과 노동 문제를 연결해 본 사람이 비단 박영희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야기가 창작될 당시 체코의 사회적 분위기가 그러했고, 작품이 짧은 기간 내에 전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둔 것이나 사회주의 이론의 대두는 그 연관성을 부정하기 힘들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공연을 관람한 김우진도 작품을 소개하면서 주제는 “자본주의와 군국주의에 대한 부인, 모성의 고창(高唱), 노동의 신성”이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로봇을 통해 드러난 노동에 대한 관심을 토대로 작품을 해석하는 시각은 당시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주 14) 하지만 박영희는 단순히 노동 문제에 대한 기계적 접근을 넘어, 인간의 편의와 안위를 위한다는 허위 의식으로 조립된 세상의 구조와 부조리를 고발하려는 철학적 주제 의식을 바탕으로 작품에 접근했다고 볼 수 있다.(주 15) 그가 본 로봇들은 단순히 인간이 만들어 낸 피조물이 아니라 사회 구조에 속하지 못한 존재들이었다. 그것은 당시 한국이 국제적으로 처한 상황과도 다르지 않았다. 그 고발을 여성인 헬레나를 통해 이루려 했다는 것 역시 흥미로운 부분이다. 소수에 의한 노동자 혁명.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박영희는 인조‘노동자’라는 제목을 붙이고 헬레나의 10년을 구조에 순응해 안주한 시간이 아니라 투쟁을 위해 노력한 시간인 5년으로 바꾼 것이다. 이러한 확실한 목적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R.U.R.』은 발표된 지 5년 만에 한국어로 번역돼 활용될 수 있었다. 여기에서도 SF가 가진 도구적 성격과 프로파간다로서의 성향은 유효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부분에서 알퀘스트를 제외한 인간을 모두 제거한 로봇의 우두머리 라디우스가 “더 이상 인간은 없다. 로봇들이여, 일터로! 전진!”(주 16)이라고 외치는 부분은 결국 혁명 이후에 구체적인 청사진을 그리지 못했던 당대 사회주의의 한계를 고스란히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차페크 역시, 그러한 막막함 때문에 결국 모든 것을 창세 직전과 같이 되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1. 카렐 차페크, 『로봇: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 김희숙 옮김(서울: 모비딕, 2015), 203–204 참조.

2. 이에 대한 정보는 극작가 김우진이 일본의 쓰키지 소극장(築地小劇場)에서 상영된 「인조인간」(人造人間)을 관람한 뒤 남긴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우진, 「쓰키지 소극장에서 인조인간을 보고」, 『개벽』, 72호, 1926년 8월, 20 참조.

3. 이광수, 「인조인(人造人): 보헤미아 작가의 극」, 『동명』, 31호, 1923년 4월, 15–16 참조.

4. 김종방은 1925년 5월에 원작 3막의 내용만 번역되어 소개되었다고 밝혔지만 모든 텍스트가 번역, 소개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김종방, 「1920년대 과학소설의 국내 수용양상 연구: 「80만 년 후의 사회」와 「인조노동자」를 중심으로」, 『한국문학의연구』, 44호(2011), 123.

5. 김종방은 「인조노동자」의 원전을 밝히기 위해 우가 이츠오의 「인조인간」(1923)과 스즈키 젠타로의 「로봇」, 그리고 「인조노동자」에 나타난 대사와 지문을 비교하며 박영희가 스즈키 젠타로의 번역본을 참조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데, 여기에 원작과 다르게 막이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더하면 「인조노동자」가 스즈키 젠타로의 번역을 참고했을 것이라는 가설은 더욱 힘을 얻는다. 같은 글, 123–126 참조.

6. 스즈키 젠타로 역시 2화부터는 로봇을 ‘인공 노동자’로 번역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박영희의 번역이 독창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후술하듯이 이를 작품의 제목으로 사용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김미연, 『번역된 미래와 유토피아 다시 쓰기: 1920년대 과학소설 번역과 수용사』(서울: 소명출판, 2022), 47 참조.

7.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선』, 김재기 편역(서울: 거름, 1988), 292.

8. 박영희, 「문단의 투쟁적 가치 1」, 『조선일보』, 1925년 8월 1일 자, 3면.

9. 차페크, 『로봇: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 71.

10. 카렐 차페크, 「인조노동자」, 박영희 옮김, 『개벽』, 57호, 1925년 3월 1일, 62–63.

11. 박영희, 「인조인간에 나타난 여성」, 『신여성』, 1926년 2월 참조.

12. 한민주, 「인조인간의 출현과 근대 SF 문학의 테크노크라시: ‘인도노동자’를 중심으로」, 『한국근대문학연구』, 25호(2012): 431 참조.

13. 박영희, 「인조인간에 나타난 여성」, 참조.

14. 김우진, 「쓰키지 소극장에서 인조인간을 보고」, 22 참조.

15. 송명진, 「근대 과학소설의 ‘과학’ 개념 연구: 박영희의 「인조노동자」를 중심으로」, 『어문연구』, 42권 2호(2014): 202–203 참조.

16. 차페크, 『로봇: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 154.

이지용
문화 평론가, SF 연구자. 『한국 SF의 스토리텔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단국대학교 인문사회 융합인재양성 사업단의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표 저서로 『한국 SF 장르의 형성』이, 공저로는 『비주류 선언』, 『SF 프리즘』, 『인공지능이 사회를 만나면』, 『인류세 윤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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