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한반도에 SF가 도입된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식민지 체제로 전환되면서 근대화에 대한 열망과 부국강병을 표상했던 SF는 계몽이라는 목적은 유지되었지만 담기는 메시지가 제약될 수밖에 없었고, 한글로 된 정기적인 지면이 줄어들면서 더욱 위축되었다. 게다가 일제강점기 자료들은 역사 해석과 의미 부여에 따라 제대로 된 접근이나 연구가 상당 기간 이뤄지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앞서 밝혔던 『월세계 여행』의 자료에 대한 발굴이 뒤늦게 이뤄진 것도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역자인 신태악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사라는 사실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예시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민태원의 「오색(五色)의 꼬리별」이다.(주 1)
「오색의 꼬리별」은 1930년 10월 28일부터 『매일신보』에 연재를 시작하여 1932년 3월 20일까지 연재되었다. 최종화는 378화이고 완결되지는 않았지만, 전체 이야기의 진행으로 보아 상당한 분량의 장편이 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듯 상당히 오랜 기간 연재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 대해서는 그동안 제대로 된 접근이 이뤄지지 않았다. 「오색의 꼬리별」을 연재하면서 민태원이 ‘계명성’(啟明星)이라는 필명을 사용했기 때문에 작가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 첫 번째 이유라고 할 수 있다.(주 2) 하지만 해당 작품이 민태원의 작품임이 밝혀지고 난 다음에도 상당 기간 작품에 대한 분석이 이뤄지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민태원 역시 친일 인사로 여겨진 점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주 3) 또한 연재된 지면이 『매일신보』였다는 것도 하나의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적으로 『대한매일신보』가 합병당하면서 만들어진 『매일신보』는 실질적으로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다. 그랬기 때문에 해당 지면에 실린 작품들에 대한 접근 및 의미 부여가 그동안 제한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주 4) 「오색의 꼬리별」이 제목에 달아놓은 ‘과학소설’이라는 분류도 그동안 접근이 미비했던 이유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작가를 특정하기 어려운 작품이었고, 작가가 밝혀졌으나 친일 행적이 있다고 여겨지는 인사였던 데다가, 일제강점기에 총독부의 기관지에 연재된 작품, 심지어 문학 연구에서 변방에 놓여 있던 SF에 속한 데다, 미완으로 남겨진 작품이라는 다양한 문제들이 엉킨 것이다.
실제로 「오색의 꼬리별」은 한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고, 연구를 통해 그 정체가 밝혀진 이후에도 원문에 대한 접근이 적극적으로 이뤄지지 않아 단순히 번역 혹은 번안 작품으로 분류되었다.(주 5) 하지만 2000년대 이후 민태원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면서 그가 쓴 작품이나 논설에 대해서도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는 일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오색의 꼬리별」을 창작 소설로 해석하는 의견들이 나타났다. 민태원의 서사 작품을 연구한 최수웅은 민태원의 활동을 설명하면서 1929년 『신소설』에 발표된 김동인의 「K–박사의 연구」 등의 영향을 받아 이러한 작품이 창작되었다고 분석한다. 특히 민태원이 소설을 번안할 때 보통 “배경과 풍속은 외국 명칭을 사용하고 인명만 한국식으로 바꾸어 표기”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기존 방식을 따르지 않은 데다가 번안과 관련된 증거도 나타나지 않은 점을 지적한다.(주 6)
「오색의 꼬리별」은 미국 워싱턴 교외의 실험실을 배경으로 수 회차에 걸쳐 한국의 천재적인 과학자 ‘리털’(李哲)에 대한 소개와 그가 지닌 뛰어난 과학적 역량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된다. 경성으로 돌아온 리털이 비행기를 개발한 후에는 무대가 중국으로 바뀌는데, 이 과정에서 탐정소설의 형식이 복합적으로 적용되면서 소설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줄거리로 짐작해 보면 리털이 과학 기술적 역량을 동원해 SF적인 형태로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가 전개될 것으로 기대되지만 연재가 중단되면서 결말을 확인하기 요원해졌고,(주 7) 연재된 회차까지의 이야기만으로는 원작이라고 할 만한 작품을 특정하기도 힘들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하면 이 작품을 창작물로 보아도 좋을 것인데, 그렇다면 창작 SF, 그중에서도 장편 SF에 대한 계보 조정이 필요하다. 이전까지는 한국 최초의 장편 창작 SF를 1968년 문윤성의 『완전사회』로 보고 있었는데, 그보다 훨씬 앞선 일제강점기에 장편 SF에 대한 창작이 시도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미완성에 그친 작품이지만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면 378화라는 긴 시간 동안 장대한 이야기를 연재했다는 것 자체는 충분히 의미를 부여할 만하다. 특히 주인공인 리털 박사가 명백한 과학기술 강국인 미국을 배경으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지적인 성과를 거두고, 다시 조국으로 돌아와 발명을 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는 설정 자체만으로도 퍽 흥미롭다. 특히 과학적 역량을 가진 주인공이 미국과 중국을 오가면서 활약한다는 설정은 이전의 계몽적인 소설들에 비해 좀 더 확장된 서사적 역량을 보여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민태원의 소설 쓰기는 이전부터 그가 소설을 번안하거나 기자로서 논고 등을 집필하면서 보여 준 실용주의 및 계몽주의 노선의 연장선에서 해석해 볼 수 있다.(주 8) 특히 그가 당대에 “가장 앞서지는 못했지만 선도자 그룹에서 흐름을 이끌었던”(주 9) 인물이었음을 대입해 보면, 시류에 민감했던 작가가 그 당시 시도되고 있었던 과학소설이라는 방법론을 차용하고, 미국의 과학기술과 비행기라는 발명품의 개발에 한국 과학자가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계몽주의적 관점이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가 논설과 기사를 통해 지속적으로 보였던 한반도와 중국의 관계 등 지정학적 위상에 대한 관심이 소설 중반 이후 중국으로 무대가 바뀌어 문제를 해결하는 형태로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
원작이라 할 만한 작품이 명확하게 발견되지 않은 데다 지금까지 열거한 여러 정황을 대입해 보면 「오색의 꼬리별」은 창작물로 여길 근거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일제강점기 자료들에 대한 좀 더 면밀한 접근이 이루어질 필요도 다시 한번 확인된다. 당시 SF는 유럽에서 발현된 이야기 형식들이 미국에서 장르적 정체성을 만들어 나가면서 이른바 황금시대로 불리는 잡지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쥘 베른이나 H.G 웰스가 인기를 끌면서 이후 SF 문화가 지속적으로 발전했으며, 이러한 시류는 분명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에서 SF 텍스트들에 대한 접근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이뤄졌지만, 민태원처럼 다양한 원인과 시대적 특수성으로 인해 제대로 조명되지 않거나 발굴되지 못한 일제강점기 자료들이 여전히 남아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울러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시대적 상황은 또 다른 한국 SF의 특징이 발현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까지 존중받지 못했던 ‘어린이’라는 존재가 등장하고, 그들을 계몽의 대상으로서 하는 SF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주 10) 대표적으로 방정환이 어린이 운동의 일환으로 발행한 잡지 『어린이』 1930년 9월호에 실린 허문일의 「천공(天空)의 용소년(勇少年)」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작품은 서문에 ‘번안자’라고 표기되어 있어서 번안작으로 알려졌지만 여전히 원작에 대한 연구는 진행되지 않은 상태다.(주 11)
「천공의 용소년」은 주인공인 화성인 ‘한달 소년’과 스승인 별박사가 몸에 날개를 부착하고 우주로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이다. 1화에는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행성인 화성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려는 듯 ‘화성소설’이라고 쓰여 있지만, 2화부터는 실제로 우주여행에 필요한 과학기술들을 설명하고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과학소설’로 표기가 수정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천공의 용소년」도 2화를 마지막으로 연재가 중단되었다.(주 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한국에서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SF 창작의 시작점에 위치한 작품으로서 의의가 크다. 물론 이전의 번안 작품들도 청년들을 계몽의 대상으로 상정하고 발표된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1920년대를 전후해 등장한 어린이라는 범주는 기존의 청년과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었다.
특히 서구나 일본에서와 달리 일제강점기 한국에서 어린이는 단순히 인권운동이나 계몽운동의 대상이 아닌, 식민 지배라는 암울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민족의 희망이었다. 이에 대한 설명을 당시 어린이에 부여하던 의미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우리 어린이는 그 뜻이 이 세계의 장래 주인공이라는 말이다 – 그럼으로 우리 어린이들은 씩씩한 긔상과 고–흔 심정과 쾌할하고도 부즈런한 마음을 항상 새롭게 하야 이 세계의 지금 주인공이신 아버님 어머님 선생님보담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주 13) 게다가 어린이는 그 당시 연령층을 일컫던 ‘늙은이’, ‘젊은이’와 같이 대등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해방의 언표였다.(주 14) 결국 어린이라는 개념을 통해 “미성년자에게 지금까지 없었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새로운 문화적 실천을 시도”한 것이다.(주 15)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을 타계하는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지성과 정서적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수련될 수 있는 어린이라는 대상을 발견하고 그들을 위한 이야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시기의 SF 창작이었다고 볼 수 있다.(주 16)
이러한 어린이를 위한 계몽에 근대화의 표상으로 여겨지는 과학기술에 대한 정보 전달은 매력적이고, 어쩌면 필수적인 요소였다고 여겨진다. 「천공의 용소년」에서도 이전까지의 SF가 번안과 창작을 가리지 않고 그러했던 것과 같이 과학기술에 대한 설명이 등장한다. 다만 아동과 청소년이 대상이었던 만큼 알기 쉬운 문답을 통해서 과학기술에 대한 설명을 진행하는 부분이 눈에 띄는데, 특히 발명품에 대해 주인공인 한달 소년이 궁금한 점을 묻고 스승인 별박사가 답하는 방식이 주를 이룬다. 과학기술에 대한 경이로움과 이를 통한 새로운 이상향의 제시가 주를 이뤘던 기존 SF와 달리 마치 과학 교과서처럼 기술에 대해 성실하고 직접적인 설명이 진행되는 것이다.(주 17)
여기서 시작된 특징은 결국 해방 이후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SF가 아동‧청소년을 위한 과학 교육이란 목적성을 가지고 발전하는 형태로 이어지게 된다. 한국 SF의 대표적이라 할 만한 특징이 바로 이 시점부터 구체화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일제강점기는 분명 우리 역사에서 아픈 지점이지만, 그로부터 결과하는 현상들이 가지는 의미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것인가는 중요한 부분이다. 구한말의 근대화에 대한 열망이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시기를 지나면서 어떻게 변용되고 또 나름의 출구를 찾기 위한 노력을 보였는지, 그로 인해 이후 어떠한 형태들로 의미화되었는지 살펴보는 것 또한 우리 역사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빠질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SF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주
1. 이 글에서는 일제강점기의 작품 가운데 그동안 SF로 분류된다고 여겨지던 몇 가지 작품들을 의도적으로 제외했다. 『과학조선』 1935년 11월 호에 실린 「삼대관 괴사사건」의 경우 표제가 과학소설이지만, 탐정소설에서 과학적인 논리로 사건을 해결하는 장르적 관습에 충실하기 때문에 추리소설에 가깝다고 여겨 논의하지 않았다. 비슷한 논리로 『신시대』 1941년 5월 호에 수록되었던 「소신술」 역시 H. G. 웰스의 『투명인간』과 같은 형태라고 할지라도 본문 내에서 과학적 상상력에 대한 부분들이 지나치게 소략하기 때문에 SF라는 범위에서 제하고 논의를 진행하였다. 또한 1928년 「용과 용의 대격전」도 우화 혹은 판타지 장르에 포섭되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다. 1933년 『신동아』 2월호에 수록되었던 김자혜의 「라듸움」 역시 라듐에 대한 헤프닝을 엮은 짧은 콩트에 지나지 않아 제하였다.
2. 「오색의 꼬리별」 저자인 계명성이 민태원이라는 연구는 2010년에 발표되었다. 민태원, 『민태원 선집』, 권문경 엮음(서울: 현대문학, 2010), 496–497 참조.
3. 권문경, 『우보(牛步) 민태원(閔泰瑗) 연구』, 석사 논문(인하대학교 대학원, 2008), 12–22 참조.
4. 정진석은 『매일신보』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 신문은 일제의 입장을 대변하여 ‘일선(日鮮) 융화’와 ‘세도인심(世道人心)의 감화 유도’라는 원칙에서 제작되었고 편집의 방향은 ‘내선일체’라는 침략의 논리를 강조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정진석, 『인물 한국언론사: 한국 언론을 움직인 사람들』(서울: 나남출판, 1995) 참조.
5. 박상준, 「작품해설: 한국 과학소설의 여명기」, 허문일‧김동인‧남산수 지음, 『천공의 용소년: 한국 근대 SF 단편선』(서울: 아작, 2018), 112 참조.
6. 최수웅, 「민태원 서사작품의 특징과 활용방안」, 『민태원 문학자료의 서지(書誌) 연구와 활용 방안』, 민태원기념사업회‧가야 엮음(서산: 우보민태원기념사업회 편집국, 가야, 2022), 125.
7. 이 시기 민태원은 『매일신보』에 「오색의 꼬리별」을 연재하면서 만주에서 ‘동명일보’(東明日報)라는 제호의 신문 발간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 계획이 무산되면서, 연재를 중단하고 다른 작품 창작으로 넘어가게 된다. 같은 글, 126 참조.
8. 나소정, 「민태원 논설자료의 원전 연구와 그 활용」, 『민태원 문학자료의 서지(書誌) 연구와 활용 방안』, 151–188 참조.
9. 최수웅, 「민태원 서사작품의 특징과 활용방안」, 124 참조.
10. 어린이라는 단어는 그 전부터 존재했으나, 방정환이 1922년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면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한국아동청소년문학회, 『100개의 키워드로 읽는 한국 아동청소년문학』(파주: 창비, 2023), 41 참조.
11. 천공의 용소년 1화 연재 지면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이것은 화성(火星)이라는 별나라에 사는 ∵라는 소년과 그 아저씨 X박사가 실지로 행한 일을 간단하게 추리여 쓴 이약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모다 ∵등 화성사람들의 쓰는 글자를 알지 못함으로 소년의 일흠은 한달이라 부르고 그아젓씨는 별–박사라고 부릅시다. ―번안자” 허문일, 「천공의 용소년」, 『어린이』 8권 8호, 1930년 9월, 58; 박상준, 「작품해설: 한국 과학소설의 여명기」, 109 참조.
12. 잡지에 실린 중단 사유는 다음과 같다. “어린이 이달치는 임의 신문지상을 통하야 발표된 바와 가티 당국에 제출하엿든 원고 전부가 불허가의 처분을 바든 까닭에 두 번씩 써주신 원고 이외에 것은 읏절 수업시 못 들어가게 되엿습니다. 이달호에 끝을 내려든 계속 독물을 영영 못 내게 된 것과 바쁘신 중에 어린이를 위하야 붓을 들어주신 여러분 선생의 조흔 글을 이상 사실로 인하야 못 실게 된 것을 필자께 또는 독자께 사(謝)하옵니다.” 『어린이』 8권 10호, 1930년 12월, 1.
13. 조재호, 「어린이데–선물」. 『어린이』 3권 5호, 1925, 5.
14. 윤극영, 「소파 방정환(나의 이력서 제7회)」, 『한국일보』, 1973년 5월 16일 자.
15. 조은숙, 『한국 아동문학의 형성: 아동의 발견, 그 이후의 문학』(서울: 소명출판, 2009), 93.
16. 다프나 주르, 『근대 한국 아동문학: 동심과 미래상 그리기』, 세계아동청소년문학회 외 옮김(서울: 소명출판, 2022), 92–93 참조.
17. 서희경, 「『어린이』에 나타난 근대의 문예창작」, 『방정환연구』 5권 2호(2023): 130–139 참조.
문화 평론가, SF 연구자. 『한국 SF의 스토리텔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단국대학교 인문사회 융합인재양성 사업단의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표 저서로 『한국 SF 장르의 형성』이, 공저로는 『비주류 선언』, 『SF 프리즘』, 『인공지능이 사회를 만나면』, 『인류세 윤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