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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동생
Art’s Little Brother

릭 포이너

디자이너는 미술과 미술가들에게 항상 열등감을 느껴왔다. 대개는 그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말하진 않지만—누가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겠는가—사실이 그렇다. 어느 때보다 디자인의 문화적 역할이 커졌다든가, 혹자가 주장하듯 디자인이 더 중요한 활동이 되었다든지 하는 것과는 상관없다. 낡은 사고방식은 여전하고, 힘의 균형도 그대로인 듯하다.

아주 성공한 미술가들이 얻는 만큼 경제적 보상과 인정을 받는 디자이너는 드물다. 특권을 가진 미술의 위상을 끊임없이 강화하는 것은 미술과 디자인에 대한 미디어 보도다. 모든 신문에는 하나같이 미술 평론가들이 있어서 미술 및 문화 지면에 매주 새로운 전시 리뷰를 써 대는 반면, 디자인은 여전히 진지한 논의에 걸맞는 주제가 되지 못하고 있다. 디자인은 라이프스타일 문제로 다뤄진다. 선망의 대상이 되는 가정집 인테리어를 소개하거나 집을 위해 사는 제품에 주목하는 논평 기사들은 약소하고 얄팍하다. 디자인 책과 전시는 대개 무시된다. 편집자들에게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마치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었다는 듯이 이렇게 말한다. “이제까지 디자인 비평은 실은 적이 없어요.”

그러나 디자인과 미술의 관계성, 유사성, 차이점, 그리고 두 분야가 지금 어떻게 접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떠날 줄 모른다. 디자인과 미술의 구분은 양쪽 종사자들의 이해관계가 달린 중요한 문제다. 일부 미술가들은 현대사회와 상업에서 디자이너들이 맡은 역할에 매혹된다. 그들은 그것에 관한 작품을 만들고 자신만의 디자인도 창조한다. 어떤 디자이너들은 그들의 창작품을 일종의 개인적 표현을 위한 매체로서, 대개 미술의 전유물처럼 보이는 주석을 다는 데 점점 치우친다. 뉴욕에 있는 쿠퍼 휴잇 국립 디자인박물관의 책임 큐레이터인 바바라 블뢰밍크는 “21세기가 흐르면서 디자인과 미술의 차이는 갈수록 가늠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역설적이게도 블뢰밍크는 최근에 열린 전시 『디자인≠미술』(2004)에서 부지불식간에 (그들 사이의) 낡은 불균형을 강화했다. 전시 도록에서 그녀는 “현재 디자인의 부상은 전통적으로 특권적 위치에 있던 미술의 유효성을 묻는 질문에 새로운 타당성을 부여한다”고 했는데, 이건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전시 제목에 쓰인 ‘같지도, 더 낫지도, 못하지도 않다’는 의미의 저 불가사의한 수학적 기호를 통해 박물관이 하려던 말은 무엇일까? 쿠퍼 휴잇은 디자인 박물관이다. 그런데 전시에서는 도널드 저드나 스콧 버튼, 제임스 터렐처럼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미술가들의 작품들만 소개했다. 관람객들은 미술가들의 디자인과 그와 비슷한 대상을 다룬 디자이너들의 작업을 비교할 기회를 갖지 못했으며, 좀 더 미술적 형식을 갖춘 디자인을 생산하는 디자이너들의 사례는 아예 전시되지도 않았다.

‘디자인 미술’ 현상을 다룬 새로운 연구서도 마찬가지로 편파적이다. 미술 평론가 알렉스 콜스가 쓰고 테이트에서 펴낸 『디자인아트』는 앙리 마티스, 소니아 들로네, 저드, 파르도와 같은 미술가들이 문양, 가구, 인테리어, 건축을 다루는 방식을 검토한다. 콜스는 “디자인미술을 숙고하는 동안 명심해야 할 중요한 쟁점은, 설령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더라도 모든 미술은 디자인된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디자인을 향한 더 유연한 접근법”이 촉진되길 희망했는데, 누가 그런 생각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콜스가 취한 방식은, 미술가에게는 어떤 혜택이 주어질지도 모르겠지만 둘의 관계에 있어 미술의 우위를 확고하게 해 주는 식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미술과 닮은꼴을 생산하는 디자이너들을 그가 배제한 것은 더욱 말할 것도 없다. 미술가들은 미술을 확장하고 새롭게 하기 위해 디자인을 향한 여행이 허락된다. 그러나 아무도 반대 방향으로 여행하는 이가 없는 이 여정은 일방통행처럼 보인다. 문화적 위계에서 미술과 디자인의 고정된 위상은 의심 없이 받아들여진다.

이 시점에서, 미술로부터 디자인을 구별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그동안 디자이너들은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는 살펴볼 만하다. 여기에 대한 가장 훌륭한 설명 가운데 하나는 노먼 포터의 고전 『디자이너란 무엇인가』(What is a Designer) 중 한 장인 「디자이너는 예술가인가?」에 나와 있다. 포터는 확실히 ‘아니다’라고 답한다. 예술가와 달리 디자이너는 “타인을 통해, 타인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이 아니라 타인의 문제를 주로 다룬다.” 반면 “화가에게 으뜸가는 임무는 자신의 시각에 충실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대개 디자이너와 미술가의 역할 사이에서 빚어진다. 미술가가 스스로 세운 목표를 좇아 자유롭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 한편, 디자이너는 실용성과 기능의 문제를 다루어야만 한다.

포터에게 중요한 개념은 디자이너는 본질적으로 계획가이자 문제 해결자, 감독관으로서 다른 이들이 디자인 생산을 완수할 수 있도록 분명한 지침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화가나 조각가는 손과 눈에서 전해오는 피드백에 더 많이 의지하며, 재료를 직접 경험함으로써 작업을 발전시킨다. 디자이너는 순수 미술가에게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객관성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포터는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말처럼 간단명료하지 않다. 매우 이지적인 미술가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더 격정적이고 다소 주관적인 디자이너들도 있는 것이다.

디자이너와 마찬가지로 많은 미술가들이 사진, 비디오, 컴퓨터로 작업한다. 미술가는 종종 작품을 만들기 위해 숙련된 기술을 가진 전문가에게 의지한다. 따라서 조력자에게 정확한 지침을 주어야 한다. 한편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한때 각 단계의 사람들이 수행했던 특정화된 임무와 기술은 디자이너의 데스크톱과 통제로 대체되었고, 더 이상 상세한 지침을 준비할 필요도 없어졌다. 특히 그래픽 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의 경우가 그렇다. 손을 사용해 구식 예술 재료를 직관적으로 형태화하는 작업에 비해, 디지털 도구를 사용하는 디자인 작업은 더 탐구적이고 개방된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기능과 비전이라는 본질적인 분리로 돌아간다. 도널드 저드는 수년 동안 대중의 시선을 피해 감춰 두었던 그의 미술과 디자인 작업의 차이를 밝혔다. 1993년에 말한 그의 설명을 들어 보자. “예술의 형태와 규모는 가구나 건축으로 탈바꿈할 수 없다. 기능적이어야 하는 가구나 건축의 의도와 예술의 의도는 다르다. 의자나 건물이 기능적이지 않고 예술로만 보이려고 한다면, 그건 말도 안 된다. 의자의 예술은 예술과 닮은꼴이 아니라, 어느 정도 의자로서 가지는 합리성, 유용성, 그리고 규모에 있다. (···) 예술 작품은 작품 그 자체로서 존재하고, 의자는 의자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 의자라는 개념은 의자가 아니다.”

저드에게는 그런 구별을 고수할 만한 좋은 이유가 있었다. 추상미술을 겨냥한 가장 나쁜 혐의는 그것이 ‘장식적’이었다는 것이다. 1967년 미술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새로 등장한 미니멀아트를 “미술보다 가구에 가깝다”는 말로 공격했다. 그리고 그것을 미술가의 손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좋은 디자인’과 비교하며 대놓고 조롱했다. 저드의 가구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면, 분명히 그의 미술은 같은 수준으로 강등되는 위험에 처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드는 그것을 회피함으로써 이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했다. 콜스는 저드의 “포개 올린 조각은 숭고한 선반 유닛이, 플로어 조각은 편안한 의자가 될 것이다”라며 농담을 건넨다. 어떤 이들은 저드의 가구는 가구로서 실패이며 결국, 예술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결국 앉기 불편한 그의 가구는 ‘디자인은 곧 기능’이라는 시험대에서 떨어질 게 빤하기 때문이다. 미술 평론가 매튜 콜링스는 론 아라드의 최근 모노그래프에서 그와 장시간 인터뷰를 가졌는데, 여기에서도 미술인가 디자인인가에 대한 의문이 다시 부상한다. 저드는 자신이 갖고 있던 리트벌트 의자 하나를 텍사스 마파에 있는 자기 집에 그가 만든 작품들과 함께 진열해 놓았다. 콜링스와 아라드는 만약 리트벌트 의자와 저드의 의자를 런던에 있는 코벤트 가든으로 가져가 하나씩 놓아 두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한다. 아라드는 이렇게 말한다. “어느 것이 디자인이고 어느 것이 예술이냐고 물어보면 사람들은 당신이 농담을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아니면 이렇게 생각하겠죠. 왜 그런 구별이 필요하지?”

정말 왜인가? 지난 20년간 디자인에 관한 개념이 확대되어 온 방식을 보여 주는 데 아라드의 작업보다 나은 예는 별로 없다. 아라드는 ‘디자인 미술’에 관한 전시나 책에 포함되는 단골 후보이기도 하다. 그는 1987년 미술과 디자인을 다룬 (지성들의 학제 간 만남을 기대했지만 실패한) 카셀 도큐멘타 8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에드워드 토다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를 통해 런던에서 미술의 영토로 진출한 최초의 디자이너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가 만든 의자는 기능적이었을 뿐 아니라 저드가 말한 ‘의자라는 개념’과도 관계된 것이었다.(또한 그는 콘크리트로 된 턴테이블과 안테나처럼 뽑히는 조명도 만들었다.) 당시 디자인 평론가 데이언 수직은 그를 디자인을 주제로 작업하는 ‘예술가’로 바라보길 제안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의 작업은 ‘앉기’와 관련된 의자의 특질뿐 아니라 의자의 상징적, 암시적, 문학적 차원까지 다루었다.

아라드는 1980년대 자신의 디자인에 각별한 의미의 층을 부여하려던 많은 디자이너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문화적 활동으로서 디자인을 논의하는 움직임은 미미했으며, 디자인의 강화된 잠재성을 폭넓고 비판적으로 자각하려는 노력도 더디게 진척되었다. 아라드와의 대화에서 콜링스는, 그는 무언가가 미술이 아닌 디자인이 되는 지점을 알고 있지만 디자인의 개념이나 역사에 대해서는 “너무 순진한” 구석이 있다고 말한다. 아라드는 부끄러워하며 자신의 무지를 인정한다. 콜링스는 디자인과 미술의 본질적인 차이에 대해 우리에게 익숙한 평을 자기 식으로 들려준다. 즉 예술은 수수께끼 같은 반면 디자인은 기능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종종 미술 세계의 불가사의는 더 이상 신비롭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 말은 전적으로 옳다. 미술의 판에 박힌 틀은 종종 빤하고, 자주 중복되며, 진부하다.

이 점에 있어 아라드의 작업은, 확실히 신비로운 감각을 보유하고 있다. 런던의 셸턴 거리에 있는 그의 원 오프(One Off) 전시 공간은 매끈한 가구 쇼룸처럼 보이지 않는, 부풀어 오른 강철 시트의 동굴이었다. 이 밖에도 기능적 역할을 뛰어넘어 예술과 관계된 어떤 특질들을 획득한 디자인 예들은 많이 있다. 임스 부부의 의자 라 셰즈(La Chaise), 쿠라마타 시로가 금속 메시로 만든 안락의자인 「달은 얼마나 높은지」(How High the Moon), 다니엘 웨일의 플라스틱 가방 속에 해체된 라디오, 던 앤드 라비가 만든 전자 방사선에 반응하는 GPS 테이블. 이러한 신비로움은 우리가 형태에 기대하는 관습적인 가능성과 한계가 뒤집히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사용할 뿐 아니라 보고, 생각하고, 거기에 반응할 작품으로서 그들이 주는 감각적, 지적, 감성적 만족은 조각이 주는 경험과 흡사하다.

헬라 용에리위스 역시 종종 디자인과 미술의 구분을 희미하게 만드는 또 다른 디자이너다. 최근의 모노그래프에 실린 그녀의 말을 들어 보자. “만약 당신이 디자이너로서 주제를 장악하지 못하고 거기서 더 나아간 중요한 의미들을 탐색하지 않으면, 불가피하게 표피에서 헤어나지 못할 겁니다. 결국 그것은 막다른 길이에요. 나는 우리가 스스로를 실용적인 측면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실수라고 믿습니다.” 질문자가 그녀는 어쩌면 잘못된 직업을 택했을 수도 있으며, 어쩌면 디자이너는 다른 측면의 이야기를 미술에게 남겨 두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뜻을 내비치자, 그녀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유용한 사물들 역시 그들 나름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그게 그렇게나 많이 문제가 될까요? 그게 예술이든 디자인이든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요?”

디자인이 예술에 아주 가까이 다가설 때, 우리는 흔히 디자인이기를 그만두고 예술이 되려 한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디자이너들은 종종 경계를 가로지르는 것처럼 보이는 동료들을 제일 먼저 비난하고 나선다. 어떤 이들은 그런 모험을 쓸데없는 자기표현으로 보고 깊은 혐오감을 드러낸다. 심지어 그런 모험적인 디자인이 기능 면에서 필요조건을 만족시킬 때도 그런 불평을 늘어놓는다. 이러한 비평은 흔히 디자이너의 손길이 닿은 흔적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믿는 특정 디자인 미학에 대한 선호에 그치게 마련이다. 토르트 본체는 많은 산업 디자인 제품에서 보이는, 모더니즘에서 파생된 차갑고 기계적인 디자인 언어를 의도적으로 거부하기 위해 뻔뻔하게 자신의 작업에 장식적 모티프를 이용한다. 이제 일부 디자이너들은 거리낌 없는 장식을 도피처가 아닌, 인간성을 회복시켜 주는 디자인 방법론의 하나로 바라본다.

스티븐 베일리는 산업 디자인이야말로 늘 20세기의 진정한 시각예술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것은 괜찮은 쇼맨십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런 인식이 받아들여진다 해도, 현재 시점에서 디자인과 미술의 위상을 단호히 뒤바꾸는 것은 그럴듯하지가 않다. 우리의 목표는 미술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다. 디자인에게 새로운 예술이라는 왕관을 씌우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분명한 목적은 디자인의 위상을 끌어올리려는 것이다. 미술과 디자인은 가능성의 연속체로서 존재한다. 수많은 형식을 취하는 미술과 디자인의 양태 앞에서 그저 말로만 그럴듯한 융통성 없는 정의는 유효하지 않다. 가장 흥미로운 작업은 움직일 수 있는 여지와 논쟁을 유발시키는 틈이 존재하는 곳에서 발생하기 마련이다.

던 앤드 라비는 왜 우리가 미술과 디자인의 관계에 보다 유연하게 접근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좋은 예다. 그들은 작가로서 받아들여지길 원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들은 디자이너로서, 디자인의 맥락에서 자신들의 사색적인 연구가 강력한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스스로 추진한 그들의 프로젝트를 미술로 분류하여 갤러리에서만 전시한다면, 사람들은 그들의 작업을 일종의 예술적 판타지로서 받아들일 것이다. 또한 영향을 끼치고 싶은 회사, 기관, 정책 입안자들에게 외면당할 수도 있다. 모든 기회를 열어 두기 위해서는 새로운 디자인 사고와 연구를 포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 활동의 개념을 확장해야만 한다.

디자인이 정말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면, 그건 아마 가장 본질적인 이유 때문이다. 1960년대 이래 미술은 한낱 시각적일 뿐인 표현의 형태에 점점 의심을 품어 왔다. 미술가는 아름다움을 단세포적으로 보고, 계속해서 미학에 신경을 썼던 디자인과 장식을 얄팍하고 얼빠진 것으로 생각했다. 미술가의 역할은 시각의 사색가로서 깊이를 더하고 개념을 다루는 것이었다. 뒤샹의 유산인 개념 미술은 두루뭉술한 것이 되어 버렸고, 오늘날 사람들은 개략적인 생각에 근거한 미술을 이러한 어조로 기술한다. 뉴욕 현대미술관의 새 전시관을 방문하면 예술이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후기인상주의, 입체주의, 야수파, 표현주의, 절대주의, 초현실주의와 같은 20세기 초의 작품들은 무궁무진한 시각적 자극과 즐거움을 선사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넘어가면 전시는 더욱 광대해지지만, 얄팍하다. 잔뜩 부풀려진 제스처에 종종 순간적으로 몰입할 수는 있지만 즐길 만한 것도 적고 연구할 거리도 훨씬 부족하다. 결과적으로 미학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얻어갈 것이 줄어든다.

디자인은 시각 형태가 주는 아름다움에 대해 그런 장애물이 없다. 디자인은 아름다움을 즐긴다. 아름다움이 너무 쉽고 순응적이어서, 아니 아름다움이 충분히 비판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미술가는 아름다움에 저항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갈망한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고 탐구하기 위해 시각적인 즐거움을, 우리 눈을 즐겁게 하는 색과 선, 질감과 모양을 추구한다. 디자인은 이러한 경험을 망설임 없이 제공한다. 디자인은 삶에 더욱 정교한 층을 구축하고 더욱 스펙터클하게, 더욱 구석구석 스며든다. 이제 미술보다는 디자인이 현시대의 시각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미술관에 가지 않고도 그럭저럭 살아가지만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디자인과 접촉하며 살아간다. 아마도 우리가 목격하는 디자인의 부상은 모더니스트가 등장하기 이전에, ‘장식적인’ 감각에 있어 예술과 일상의 점진적인 재통합일 것이다. 예술이 사회적, 정신적, 영혼적으로 참다운 삶을 추구한다면 왜 우리는 이들을 분리시켜야만 할까? 브뢰밍크와 콜스는 그들의 책에서 마티스의 유명한 말을 인용한다. “내가 꿈꾸는 것은 균형 잡힌 예술, 순수하고 평온한 예술이다. 이는 주제를 교란시키거나 억누르지 않는 예술이며, 모든 정신노동자와 사업가, 문필가의 마음을 부드럽게 진정시키는, 좋은 안락의자처럼 피로를 날리는 휴식을 주는 예술이다.”

마티스가 ‘좋은 안락의자’와 같은 예술을 통해 치유하고 싶었던 스트레스는 오늘날 그의 짐작보다 훨씬 극심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한 세기 전에 그가 가졌던 감상적인 꿈은 더 이상 동시대적이지 않다. 그는 회화에 대한 바람을 말한 것이지만, 이는 디자인의 감각적 수용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디자인 미술’이라는 어색한 합성어는 이해가 잘 되지 않지만, 적어도 디자인과 미술 사이의 연속성은 설명해 준다. 두 단어는 모두 우리의 시각 문화가 어떻게 진화하고 있는지 충분히 설명해 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아가 예술과 동등한, 심지어 예술의 범위를 초월하는 잠재력을 가진 디자인, 그리고 인간적이고 문화적인 표현 수단으로서 디자인에 대한 폭넓은 대중적 인식이 필요하다. 매체들은 더 이상 기분 전환용으로 디자인을 취급하지 말고, 디자인의 변화에 주의를 기울일 때다. 예를 들어 『가디언』이 그날의 리뷰 전체 주제로서 화가 카라바조에게 17면의 기사를 할애할 수 있다면, 디자인을 보다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지면도 분명히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 Rick Poyner, 2005

참고

릭 포이너
디자인 평론가, 저술가. 1990–1997년 『아이』 초대 편집장을 역임했으며 『블루프린트』(Blueprint), 『프리즈』(Frieze), 『I.D.』, 『그라피스』(Graphis) 등의 잡지에 디자인과 시각 예술에 관한 글을 지속적으로 써왔다. 런던 영국 왕립예술학교 방문 교수를 비롯해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저서로 『6개의 키워드로 풀어본 포스트모던 그래픽디자인』(No More Rules, 2004), 『릭 포이너의 비주얼컬처 에세이』(Designing Pornotopia: Travels in Visual Culture, 2006), 『거인에게 복종하라』(Obey the Giant, 200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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