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nu

documents
버리기 전에 듣는 음악 3: 내게 불 같은 평화
정우영

2025년 10월 7일 게재

『버리기 전에 듣는 음악』의 일부를 연재합니다. 매주 화요일, 다섯 번의 연재 이후 단행본이 출간될 예정입니다.

알 켈리
이그니션 앤드 이그니션 리믹스
자이브
2002년

음악계가 항상 정치적으로 덜 민감하다 느끼는 것은 알 켈리의 바이닐 가격이 그대로기 때문이다. 알 켈리가 공갈 및 미성년자 성매매 여덟 건 등 총 아홉 건의 혐의에 유죄판결을 받고 징역 30년, 벌금 10만 달러를 선고받은 2022년 이후, 알 켈리의 바이닐 시세를 검색해 본 적이 있다. 훈풍도 불지 않은 것처럼 잔잔했다. 클레어 데더러는 『괴물들』(노지양 옮김, 을유문화사, 2023)에서 “자기 동네의 작은 헌책 기부 도서관에 온통 앨런이 쓴 책과 앨런에 관한 책들로 가득하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전한다. 모르긴 몰라도 우디 앨런은 알 켈리를 자신에 비교했다면 기함을 토했다. 「애니 홀」을 못 보는 것에 비하면 「아이 빌리브 아이 캔 플라이」(I Believe I Can Fly)를 못 듣는 건 별 일도 아니다. 하지만 「이그니션(리믹스)」(Ignition [Remix])를 못 듣는다면? 어, 잠깐만요···.

알 켈리를 좋아한 적은 없다. 알 켈리의 「이그니션(리믹스)」를 좋아하는 친구들을 좋아했다. 친구가 바에서 이 곡을 신청하자, 다른 친구가 “역시! 이그니션은 리믹스지!” 했다. 「기생충」을 못 본 사람처럼 소외감을 느꼈다. (2002년, 나는 군대에 있었다.) ‘Chill’ 계열의 지펑크(G-Funk)를 좋아하는 내게도 통하는 곡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렴한 가격에 12인치를 샀다. 몸을 15도 이하로 흔들게 되는 노래 중 이렇게 기분 좋은 곡도 드물다. 이 노래를 들으며 알 켈리가 미성년자를 포함한 다수의 여성을 납치, 감금, 폭행한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다면 말이다.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라는 해묵은 질문은 ‘미투 운동’을 기점으로 가장 뜨거운 질문이 됐다. 하나의 확고한 결론을 갖고 있진 않지만,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들의 작품과 멀어지는 경험은 했다. 그러나 음반을 처분하는 적극적인 행위까지 가지는 않았다. 남자들은 좀처럼 거부 의사를 표현하는 법이 없고, 바이닐 문화의 성비 불균형이 알 켈리의 거래가에 반영됐다 본다.

한 철학과 교수의 “20–30대 남성들에게 알려 주려고 한다, 여자 분들이 집회에 많이 나온다고 하더라”는 말이 문제가 된 걸 나중에 알았다. 당시 생방송을 보며 웃어넘긴 대목이었다. 여자(사람) 친구가 나중에 이 논란을 언급하는데, 맞장구를 치기는커녕 굳은 얼굴이 됐다. 나는 남자고 언제나 몰라도 너무 모른다. 그런데 당사자주의에 숨어, 여자들에 대한 경청과 지지만으로 나쁘지 않다 여겨 왔다. 이제 와서 「이그니션(리믹스)」 12인치를 버리려는 것에 여러분의 용서를 구한다. 다만 이 음반의 처분으로 끝나지 않는다. 퍼프 대디의 「아일 비 미싱 유」(I’ll be Missing You) 12인치를 갖고 있고, 이 노래와 각별한 인연이 있다. 내가 구하는 정의는 화형식이 아니라, 알 켈리는 버렸는데 퍼프 대디는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불편하게 일깨우는 것이다.

정우영

프리랜스 에디터. 『데이즈드 앤 컨퓨즈드 코리아』(Dazed & Confused Korea)와 『지큐 코리아』(GQ Korea)에서 일했다. 음악 페스티벌 ‘서울 인기’, 잡화점 ‘우주만물’, 음악 바 ‘에코’, 온라인 음악 플랫폼 ‘버드엑스비츠’(BUDXBEATS)를 좋은 동료들과 함께 기획하고 운영했다.

related texts

documents
휠체어에서 듣는 음악 2: 뜨거웠던 여름을 기억할게
notice
리딩룸: 『알린과 발쿠르 혹은 철학소설』 읽기
documents
비행기에서 듣는 음악 3: 작은 현실과 더 작은 현실
documents
『커피 내리며 듣는 음악』, 리필: 첫 음악 감상회의 첫 곡이 담긴 음반
documents
한국 SF 연대기 11: 한국 SF 작가 협회와 전집 출판
documents
『원형체: 탈네모틀 한글의 기원』 머리말
documents
휘문고보, 영광의 나날들
documents
한국 SF 연대기 1: 한국 SF의 시작, 「해저여행기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