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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팝 아트 시대

첫 번째 팝 아트 시대
The First Pop Age

핼 포스터 지음 / 조주연 옮김

미술사학자이자 평론가 핼 포스터의 『첫 번째 팝 아트 시대』 한국어판이 출간됐다. 이 책은 흔히 앤디 워홀의 실크스크린 작업이나 만화를 차용한 릭턴스타인의 작품으로 대중에게 익숙한 팝 아트에 대한 일반적 통념을 흔들고,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며, 20세기 중엽 우리 자신에게 일어난 근본적 변화를 캐묻는다. 보다 구체적으로 리처드 해밀턴, 로이 릭턴스타인, 앤디 워홀, 게르하르트 리히터, 에드 루셰이에게 초점을 맞춰, 팝 아트가 처음 등장할 때부터 줄곧 따라 붙었던바, 대중문화를 미술의 내용으로 다룬다는 일차적인 관심을 넘어 “대중 매체가 만개한 그 순간과 놀랍도록 긴밀한 관계를 맺는”(마이클 레자) 그들의 작업을 통해 이미지가 어떻게 새로운 주체를 빚어냈는지 추적한다.

우리를 바꾼 이미지를 바꾼 다섯 미술가

포스터에 따르면, 그가 선택한 다섯 미술가는 당시 폭발적으로 확산하던 대중문화의 이미지에 반응해 각자 고유한 모델을 통해 “회화와 관람자의 조건에 일어난 변화를 다른 누구보다 더 생생하게” 감지하고 환기한다.

“긍정의 반어법”을 통해 대중문화를 고급 미술의 의식에 동화시키려 했던 해밀턴의 일람표 그림, 물화한 보편 언어로서 대중문화의 기호를 파고든 로이 릭턴스타인의 클리셰 이미지, 누구보다도 회화의 전통을 폐허로 만들며 그 자신마저도 가해하는 워홀의 괴롭혀진 이미지, 회화의 전통을 긍정하면서도 끊임없이 이를 유보하고 세계가 갖게 된 사진의 얼굴에 천착하는 리히터의 사진 친화적 이미지, 평범한 대상과 언어에 숨은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을 부조리하게 응시하는 에드 루셰이의 무표정한 이미지가 그것이다.

시기 및 지역에 따라 말하자면 “전후 영국의 젊은 미술가들을 열광시켰던 미국의 의기양양한 대중문화를 일람한 해밀턴의 팝 아트에서 출발하여 대중문화의 클리셰와 이미지에 대한 선망 혹은 공격성을 파고든 릭턴스타인과 워홀의 뉴욕 팝 아트를 거쳐, 사진을 기반으로 한 리히터의 독일 팝 아트를 살펴보고, 어느덧 퇴색을 감출 수 없게 된 미국과 대중문화를 무표정하게 응시하는 루셰이의 LA 팝 아트에서 마무리된다.”(역자 후기)

이들 다섯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아우르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거기에 내포된 복잡한 이중성이다. 즉 대중문화에 대한 환희와 경멸, 거리와 몰입은 물론, 예술에 대한 존중과 거부가 공존하는 작품을 면밀히 분석함으로써 포스터는 이들의 작업이 회화를 압박하고 그 가능성을 타진하며, 나아가 전후 이미지에 의해 형성된 주체 자체를 시험하는 모습을 관찰한다. 이로써 드러나는 것은 일견 단순해 보이는 이미지에 숨은 정교한 구성과 기법, 납작함을 넘어 텅 비어 보이는 주체들의 다면성, 손쉬운 감상을 거부하는 상이한 등식들이다.

팝 아트라는 스캔들

역자가 후기에서 명료하게 밝히듯 “현대미술의 역사는 스캔들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세기 초 낭만주의에서 미술의 현대적 전환이 일어난 이후 현대미술의 전개에 발자취를 남긴 미술은 모두 어김없이 스캔들과 함께 등장했으니까.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 마네의 「올랭피아」, 모네의 「일출」, 마티스의 「춤 2」, 피카소의 「등나무 의자가 있는 정물」 등등, 스캔들을 일으킨 작품들만 착실히 꼽아도 너끈히 현대미술사가 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팝 아트가 일으킨 스캔들은 미술이 “현실의 이상적 재현”이라는 규범으로부터 이탈한 이후, 기술과 자본주의가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기 시작한 그때, “강력한 위반의 무기”로서 대중문화를 장착하고 “변화하는 현대성으로 회화를 압박하고 변형시킨” 초대형 스캔들이다. 팝 아트가 발현하던 시기 소비 자본주의는 어느덧 금융 자본주의를 넘어 데이터 자본주의로 진입하고 있지만, 이후 팝 아트만큼 복잡한 심급으로 동시대 주체를 탐구한 경우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요컨대, 우리는 팝 아트의 첫 번째 시대를 지나왔는가, 아니면 여전히 그 시대의 여파 속에서 살고 있는가?” 저자가 던지는 질문이다.


발췌

만일 자아가 일부는 이미지라고 이해될 수 있다면, 이미지도 일부는 자아라고, 즉 심리가 투사되는 표면 혹은 스크린이라고 간주될 법하다는 것이다. 종종 팝 아트에서는, 특히 워홀의 작업에서는, 사람이 이미지의 종족들로 간주되고 역으로 이미지가 사람의 종족들로 간주되면서 사람과 이미지가 둘 다 변화무쌍한 상상계에 휩쓸리게 된다. 이는 팝 아트에서 주체와 이미지가 껄끄러운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는 견해로,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대중매체의 유명 인사 및 유명 브랜드 제품의 아이콘과 이 미술을 연결하는 통상의 견해와 대립한다.

팝 아트의 보수적인 측면을 지적하는 좌파 비평가들의 말도 옳다. 무엇보다 회화라는 전통적인 매체는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에 선진 미술에서 대체되었는데, 그럼에도 왜 이 미술가들은 회화에 전념했단 말인가? 팝 아트가 회화를 긍정함은 확실하다. 그러나 팝 아트는 또한 회화를 압박하기도 하는데, 이럴 때 팝 아트에서 대체로 회화는 이미지와 주체 모두에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힘들을 등재하는 받침 구실을 한다.

해밀턴은 그린버그와 프리드의 주체 이론, 즉 완전히 자율적이고 “도덕적으로 깨어 있는” 모더니즘의 주체를 명백히 정반대인 주체, 즉 노골적으로 욕망을 드러내고 지각적으로 산만한 물신숭배적 주체로 투사한다. 이것은 팝 아트의 또 다른 통찰로, 해밀턴이 특히 로이 릭턴스타인과 공유하는 것이다. 팝 아트의 시절이 되자, 훌륭한 만화 또는 광고와 거창한 회화 사이에는 구성적 질서에서나 아니면 주관적 효과에서나 대단한 차이가 없을 때가 많다. 하지만 회화에만 있는 독특한 총체성의 소멸을 입증한 이런 작업이 회화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 이 점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런 소멸은 오직 회화 안에서만 완전하게 밝혀지기 때문이다.

릭턴스타인은 미술과 상업디자인의 혼합을 시연하는데, 이로부터 혹자는 일단의 끔찍한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팝 아트의 시대가 되자, 많은 아방가르드 장치와 모더니즘 양식이 문화산업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 제품과 이미지, 상품과 기호가 합체했다는 것, 팝 아트 회화는 그저 이런 구조적 등가 관계를 반복할 뿐이었다는 것, 한때는 대상관계를 탐구하는 데 딱 맞는 유일무이한 매체였던 조각도 상품에 짓밟혔는데, 팝 아트 오브제는 상품의 효력을 그저 흉내나 낼 수 있을 뿐이라는 것 등등이 그런 결론이다.

릭턴스타인이나 해밀턴과는 달리, 사실 워홀의 목표는 저급 출처에서 나온 이미지를 고급 회화의 한도에 동화시키는 것, 따라서 대량문화의 압력 아래서도 회화적 통일성과 미적 총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릭턴스타인과 해밀턴에게도 전통적인 타블로를 시험하는 면은 있다. 즉, 소비사회에서 변화된 타블로의 상황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또한 타블로 본연의 포맷과 효과를 대략 보존하기도 한다. 워홀에게서는 이런 보존의 측면이 훨씬 약하다. 그는 이미지와 관람자 모두를 괴롭히는 수를 쓰는데, 이를 통해 훌륭한 구성과 적절한 관람의 관례 대부분을 없애 버리는 것이다.

워홀은 영화의 이 두 가지 포획 효과, 즉 최면 효과와 물신숭배 효과를 모두 깨뜨린다. 영화가 아닌 작업에서도 워홀은 다른 어느 팝 아트 작가보다 더 급진적으로 상상적인 것과 이데올로기적인 것의 작용을 교란한다. 이렇게 보면, 릭턴스타인이 옳았다. 워홀에 비교하면 그는 구식 미술가다. 릭턴스타인은 해밀턴처럼 현대 생활의 화가로 남는다. 반면에 워홀에게서는 그 현대성이 회화를 압도하며, 자율적 주체에게 헌정되었던 타블로의 전통은 폐허가 된다.

리히터가 찾는 것이 바로 이런 불안정한 구조, 이 제3의 항, 참을 수 없는 대립 항들 사이를 통과해 나갈 수 있는 수수께끼 같은 길이다. “무언가가 보여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보이지 않아야 한다. 이는 아마도 다른 어떤 것, 제3의 것을 다시 말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또다시, 혹자는 이런 실천이란 여러 입장을 수렴시킨 편리한 것이라고 퇴짜를 놓을 수도 있다. 지난 세대 내내 서양 정치에서 목격된 문제투성이 ‘제3의 길들’과 보조를 맞추는 미학적 삼각 분할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퇴짜를 놓다 보면 리히터가 저항하는 바로 그 냉소주의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결국에, 리히터의 중요성은 그처럼 모순적인 가능성들을 제기한다는 점, 즉 그런 가능성들이 지닌 흥미진진한 어려움들 속에 머무른다는 점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방식들로 루셰이가 가리키는 것은 상품화가 만연한 상황 속에서도 가능한 공유성의 형식들이다. 상품화의 상황을 경시하는 면모가 그에게는 거의 없다(그 반대다). 하지만 그가 활용하는 것은 여기서도 이중성이다. 한편으로, 상품화는 단어, 이미지, 물건, 공간을 소모하거나 고사시킬 수 있고, 그래서 루셰이는 왕왕 그것들을 이런 폐기된 상태로 제시한다.

이 책을 쓰게 된 계기 하나는 팝 아트의 정치적 가치라는 퍼즐을 푸는 것, 구체적인 질문으로는 팝 아트가 언제나 대중문화에 비판적인지 아니면 언제나 대중문화와 공모하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질문이 이것 아니면 저것 식으로 제기될 수 없다는 점, 내가 다룬 미술가들이 대부분 찬성과 반대의 입장 모두를 난관에 빠뜨리는 ‘긍정의 반어법’을 목표로 삼는다는 점이 금방 분명해졌다.

내가 강조해 온 팝 아트의 정치학은 겨냥하는 목표가 다르다. 이 정치학의 중심은 공유되고 있는 것에 대한 몰두인데, 거기에는 우리가 공유하는 이미지의 세계를 신식 공유자원으로 (아마도 삐딱하게) 보는 이해가 포함된다. 이런 공유성은 폄하될 때가 많고, 이런 ‘공유주의’ (Commonnism)에 문제가 많다는 점은 확실하다. 분명, 그것은 유토피아적일 때가 드물다. 실상, 우리가 워홀이나 루셰이를 안내자로 삼을 경우, 그것은 디스토피아적일 때가 그렇지 않을 때보다 많다.

이 미술가들은 시험을 받기도 하지만, 시험을 하기도 한다. 이들이 시험하는 것은 타블로의 전통, 이 전통이 규준으로 삼은 회화적 구성, 이 전통이 목표로 한 주체의 평정심만이 아니다. 이 미술가들은 대중문화, 그리고 호모 이마고로 재형성된 전후의 주체—문화 읽는 법을 새로 배워야 하고, 심지어는 새로운 상징계와 협상도 해야 하는—를 시험하기도 한다.


추천사

지난 30여 년간 포스터는 현대미술사의 주요 인물로서 예술이 20세기의 경험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풍부한 가치를 지니는지 보여주었다. [...] 이 책은 불가결하다. 우리는 당분간 대중문화가 어떻게 새로운 주체를 빚어냈는지에 대해 더 훌륭하고 설득력 있는 진술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조슈아 섀넌, 『아트 저널』

포스터는 미술에 대한 면밀하고 눈부신 독해와 경쾌한 이론적 촉각으로 다섯 미술가가 어떻게 1950–60년대 우리 자신과 이미지에 일어난 근본적인 변화를 즐기고 또 캐물었는지 보여준다. 아무도 그처럼 팝 아트를 생각하지 못했다. —해리 쿠퍼, 워싱턴 국립미술관

깊은 통찰력, 품격 있는 글, 팝 아트에 대한 기존 정설을 넘어 새로운 해석을 제공하는 독창적인 책이다. 핼 포스터의 눈을 통해 본 해밀턴, 릭턴스타인, 워홀, 리히터, 그리고 루셰이의 글과 회화는 대중문화가 만개하는 바로 그 순간과 놀랍도록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 마이클 레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차례

호모 이마고

리처드 해밀턴, 또는 일람표 이미지
로이 릭턴스타인, 또는 클리셰 이미지
앤디 워홀, 또는 괴롭혀진 이미지
게르하르트 리히터, 또는 사진 친화적 이미지
에드 루셰이, 또는 무표정한 이미지

팝 아트의 시험
역자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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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 소개

핼 포스터
미술사학자이자 평론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현대미술·건축·이론을 가르치며 『옥토버』(October)의 공동 편집자다. 저서로 『나쁜 새로운 나날』(Bad New Days), 『콤플렉스』(The Art-Architecture Complex), 『실재의 귀환』(The Return of the Real), 『강박적 아름다움』(Compulsive Beauty), 『미술, 스펙터클, 문화정치』(Recodings: Art, Spectacle, Cultural Politics), 『디자인과 범죄』(Design and Crime) 등이 있다. 특히 그가 로절린드 크라우스, 벤저민 부클로, 이브-알랭 부아, 데이비드 조슬릿과 함께 써낸 『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는 현대미술을 응축한 기념비적 저술로 평가받고 있다.

조주연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와 동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했다.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미술론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현대미술의 미학적 기원과 전개를 밝힌 『현대미술 강의』를 썼다. 이후 현대미술의 마지막 단계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미술의 중심 매체로 등극한 사진을 중심으로 현대미술과 동시대 미술이 연접 또는 이접하는 지점을 새로운 연구 주제로 삼고 있다. 저서로 『예술의 혁명, 혁명의 예술』(공저), 『미학으로 읽는 미술』(공저) 등이 있고, 역서로 『실재의 귀환』(공역), 『60년대 미술』, 『순수예술의 발명』, 『강박적 아름다움』, 『롤랑 바르트의 사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