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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의 추방자들
절판

스크린의 추방자들
The Wretched of the Screen

히토 슈타이얼 지음, 김실비 옮김

슈타이얼의 작업은 극도로 풍성하고, 농밀하며, 보답을 준다. 그는 미술 세계의 심장부에서 추문을 파헤친다. — 『가디언』

이 주술서를 찾아서, 당장 실천하라! — 『아트링크』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영상 작가이자 저술가 히토 슈타이얼의 『스크린의 추방자들(The Wretched of the Screen)』(2012) 한국어판. 2016년 광주비엔날레 주요 참여 작가이자 현재 전 세계 아트 씬에서 가장 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작가 중 한 명으로서(2015년 『아트리뷰』 선정) 그는 작업과 글, 강연을 통해 동료 작가와 큐레이터는 물론 현대 이론가들에게 줄곧 영감의 원천을 제공해왔다. 이 책에는 그의 대표작 「가난한 이미지를 변호하며」를 비롯해 「미술관은 공장인가」 등 주요 글이 모두 포함되었으며, 한국어판에는 2015년에 발표한 글 두 편이 추가로 수록되었다.

자유 낙하하는 세상에 대처하는 법

히토 슈타이얼의 글은 우리가 생각지 못한 지점을 환기하면서 시작하곤 한다. 만약 우리가 디딘 땅이 굳건한 게 아니라면?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이 세상과 함께 자유낙하 중이라면? 첫 번째 글 「자유낙하: 수직 원근법에 대한 사고 실험」부터 그는 독자를 추궁한다. 그로부터 당신이 믿고 있던 세상, 보고 있는 이미지, 향유하는 미술에 대한 의혹이 떠오른다. 근대를 가능케 했던 주요 장치로서 선형 원근법을 다룬 그의 고찰은 어느덧 21세기 들어 우리에게 익숙해진 항공 시점으로부터의 시선 역시 가짜임을, 우리에게 더 이상 단단한 토대란 없음을 밝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고 되묻는다. 그런데 애초에 우리에게 근본으로서 토대가 필요했던가? 자유낙하를 만끽하며 대열을 편성하고, 그 아찔한 낙하로부터 오는 현기증과 조우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대처하는 법이 아닐까?

이렇듯 파격적인 상상력으로 현실을 전복하는 그의 언설은 유명한 글 「가난한 이미지를 변호하며」에서도 두드러진다. 해상도와 선예도로 가치를 평가받는 이미지의 위계질서 속에서 버림받은 이미지들, 즉 이리저리 복사되고, 편집되며, 끊임없이 순환하는, 그러는 와중에 흐릿해진 이미지들은 어디로 가는가? 그들은 공식적인 스크린에서 추방당해 디지털 세계의 황무지를 떠돈다. 이 이미지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그리고 모든 것을. 슈타이얼은 “해상도와 교환가치가 아닌, 유포의 속도, 격렬함, 광대함”이야말로 현시대의 이미지를 정의하는 새로운 규준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가난한 이미지들이 수행하는 임무를 책 전체를 관통해 보여준다. 가령 「지구의 스팸: 재현에서 후퇴하기」에 따르면, 스팸 이미지들은 놀랍게도 현실 세계에 대한 이중 스파이로서 우리에게 현대 사회에 만연한 감시의 눈길을 피할 피난처를 제공해준다. 진짜냐고? 사실 당신은 스팸 이미지들을 한 번도 눈여겨본 적이 없기에 그들이 진짜 어떤 모습인지, 왜 늘 웃고만 있는지, 우리가 보지 않을 때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지 않은가.

현대미술이라는 스크린

히토 슈타이얼의 글은 또한 현대미술이 작동하는 방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사회적 공장으로서 미술관을 가리켜 그는 서슴없이 “열성껏 무급 노동하는 인턴들을 직원으로 둔, 문화 산업의 공식 대리점”이라 칭한다. 이 경제 안에서는 관람객조차 (관람이라는) 노동을 피할 수 없다. 아니 온 세상으로 확장된 미술관은 출구를 허락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삶과의 합일이라는 예술의 오랜 숙원이, 오늘날 예술에 점령당한 삶으로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예술인지 뭔지를 가끔 접할 뿐,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답할지도 모른다. 예술이 어떻게 삶을 점령하냐고? 아마도 다음 중에 당신도 해당되는 항목이 있을 것이다. 예술이 한없는 자가 수행으로 둔갑하여 당신을 사로잡고 있는가? 아침에 깨면 자신이 일종의 복제물처럼 느껴지는가? 늘 자기를 전시하고 있는가? 누군가 혹은 무언가의 앞에서 미화, 개선, 승격되거나 그렇게 되고자 한 적이 있는가? 허물어져 가는 옆 건물에 붓을 들고 다니는 애들 몇 명이 이사 온 탓에 집세가 배로 뛴 적이 있는가? 당신의 감정이 디자인된 경험이 있는가, 아니, 스마트폰이 당신을 디자인한다 여겨지는가? (…) 일회성 미술 전시에 시의 문화 예산 가운데 무지막지한 분량이 전용되는 도시에 살고 있는가? 착취적 은행이 지역 작가의 개념 미술을 사유화하는가? 이 모든 사례가 예술 점령의 징후이다.”

또한 현대미술은 자신의 분관을 세계 도처에 흩뿌리며 신자유주의 질서를 강화하는 주요 도구이다. “현대미술은 예측을 불허하고, 설명되지 않으며, 반짝거리고, 변덕스럽고, 기분파에, 영감과 천재들에 이끌린다. 독재를 꿈꾸는 모든 과두 정권이 스스로를 그렇게 연출하고 싶을 법하게. 미술가의 역할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는 독재자를 지향하는 모든 이의 자화상과 너무나도 닮아 있다. 이들에게 정부란 잠재적으로, 그리고 위험하게도, 예술의 한 형식이다.” “인권이 침해당하는 나라라고?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미술관을 지으면 된다!”

한국어판에 추가된 「면세미술」에서 우리는 심지어 그 현장을 포착할 수도 있다.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미술관은 어디일까? 히토 슈타이얼에 따르면 세계 곳곳의 자유무역항에 마련된 미술품 수장고이다. 그곳에 보관된 (선별된 자산가에게만 비밀스럽게 공개되는) 수많은 면세 미술품들은 “이동이 은폐되고 데이터 공간이 클라우드 서버에 있는, 다크넷의 미술관”에서 영원히 환승 중이다. 그들은 “마약, 파생 금융 상품, 그리고 여타의 소위 투자 기구가 그러하듯, 최소한의 추적이나 등록으로 국가 영토 밖으로 여행한다. 상자가 심지어 비어 있다 한들 우리는 알지 못한다.” 히토 슈타이얼의 글 곳곳에서 우리는 누추한 현실을 가리는 스크린으로 기능하는 현대미술과 맞닥뜨린다.

해동하라. 가속하라. 거주하라. 점령하라

이렇듯 슈타이얼의 글은 늘 현실 그 자체로 우리를 이끈다. 미술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새 신자유주의 시대 우리가 맞이한 자유로 이어지고, 그것은 “시민적 자유의 향유가 아니며, 불확정적이고 예측 불허의 미래로 던져진 많은 사람들이 으레 경험하는, 자유낙하를 할 자유”임이 드러난다. 모든 노동이 직업으로 전환된 오늘날 “하루를 마치고 사람들은 직업 현장을 떠나 집에 가서, 이전에는 노동이라 불렸던 일들을” 수행한다.

또한 그는 현대미술과 현실의 민낯을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행동가로서 그 속에 뛰어든다. 때로는 스페인 내전 당시의 암매장지를 발굴하며 실종자들이 그들의 사체로써 남긴 증언을 어루만지고, 터키에서 처형당한 친우의 흔적을 애도하고, 주권 국가를 우회하는 비밀스러운 미술품들을 추적하고,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문건의 진실을 규명하고자 애쓰며, IS의 공격으로 임시 난민 대피소로 변한 미술관들을 누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그의 작업과 연동되어 현실 세계에 개입한다. 암담한 현실을 한탄하거나 그에 주눅 들지 않고, 언제나 정면으로 돌파할 (혹은 우회할) 길을 찾아내고, 행동을 촉구한다. 그의 글은 그 자체로 하나의 강력한 선동이다. 산산조각 난 현실의 파편들을 보여주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를 다시 편집하자. 재구축하라. 재편성하라. 부수라. 표현하라. 낯설게 하라. 해동하라. 가속하라. 거주하라. 점령하라.” 스크린에서 추방당한 이미지들이 기거하는 곳, 히토 슈타이얼의 글에서 우리는 그곳이야말로 우리에게 허락된 공유지이자 점령의 영토임을 알게 된다.


발췌

수십만 년 후면 또 다른 은하의 누군가가 우리 행성에서 자본주의 교리에 인질로 잡힌 현시대의 고통을 가엾게 여기며 구경할런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어째서 벌어졌는지 이해하려고 시도한 외계 지능체는 우리의 기술적 세련과 극단적인 윤리적 우매함이라는, 그 믿기 힘든 결합에 충격을 받을 것이다. 이 책은 외계인이 그 의미를, 혹은 적어도 설명을 조금쯤 찾아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11쪽)

과거에서 온 누군가가 베레모를 쓰고 “이봐 동지, 요즘 당신네 시각적 유대는 뭐지?”라고 묻는다고 상상해보라. 그렇다면 당신은 이렇게 답할지도 모르겠다. “현재로 연결된 바로 이 링크지.”(51쪽)

누군가는 이것이 진짜가 아니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누구든 좋으니, 무엇이 진짜인지 보여달라. 가난한 이미지는 더 이상 진짜에 대한, 진짜 원본에 대한 것이 아니다. 대신 이미지 자체의 실제적인 존재 조건들, 즉 떼 지은 순환, 디지털을 통한 분산, 균열적이며 유동적인 시간의 단락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보수주의와 착취에 대한 만큼이나, 저항과 전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요약하자면, 현실에 대한 이야기이다.(52쪽)

사실 정치 영화란 언제나 같은 곳에서 상영되어왔다. 이제는 십중팔구 미술관으로 탈바꿈한 구 공장 건물들에서. 방음이 최악인 화랑, 미술 공간, 화이트큐브에서. 분명 정치 영화를 선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 공간은 또한 동시대의 이미지, 용어, 생활 방식, 가치가 생산되는 온상이 되었다. 전시 가치, 투기 가치, 제의 가치. 진중함을 더한 여흥. 거리감을 뺀 아우라. 열성껏 무급 노동하는 인턴들을 직원으로 둔, 문화 산업의 공식 대리점. 말하자면, 또 다른 방식의 공장이 된 것이다.(73쪽)

현대미술은 상표 없는 상표명으로서 무엇에든 부착될 수 있다. 현대미술은 속성 주름 제거술로서 극단적인 변신을 필요로 하는 장소들을 위한 새로운 창조적 필수 조건으로 호객한다. 현대미술은 상류층 기숙사제 학교 교육의 엄중한 쾌락과 결합한 박진감 넘치는 도박이다. 현대미술은 현기증 나는 규제 완화로 붕괴된 혼란스러운 세계를 위한 놀이터이다. 만약 현대미술이 답이라면, 질문은 곧 “자본주의는 어떻게 더 아름다워질 수 있을까?”였을 것이다.(111쪽)

전위예술의 이상은 삶에 녹아들어 혁명의 요동에 주입되기였다. 결과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비약해보자면 삶은 미술에 점령되었다. 왜냐하면 삶과 일상적 실행으로 돌아가 급습하고자 한 애초의 시도가 점차 일상적 습격으로, 종국에는 항상적 점령/직업으로 결과했기 때문이다. 요새 삶을 침략한 미술은 이례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법칙이 되었다. (…) 삶으로 포섭된 예술은 한때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정치적 계획이었으나, 예술로 포섭된 삶은 이제 미학적 계획이며 정치의 전면적인 미학화와 일치한다.(131쪽)

두터운 전파 층이 초 단위로 지구에서 송신된다. 우리의 편지, 스냅사진, 내밀하거나 공식적인 통신, 텔레비전 방송, 문자메시지가 반복되는 원형 파장을 타고 지구를 떠나간다. 그것은 우리 시대 욕망과 공포를 실은 지각적 건축이다. 수십만 년 후면 외계 지능체가 우리의 무선통신 기록을 수상쩍게 여기며 샅샅이 살펴볼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생명체가 실제 자료를 보면서 얼마나 당혹스러울지 상상해보라. 왜냐하면 무심코 깊은 우주로 발신된 사진이 사실은 스팸일 것이기 때문이다.(189쪽)

현대미술은 또한 민족 주권을 우회하는 새로운 물리적 공간을 창조한다. 동시대적 예를 들어보겠다. 바로 자유무역항의 미술품 수장고이다. (…) 이 건물에 피카소 작품 수천 점이 보관 중이라는 소문이 있지만, 기록이 대체로 불투명한 관계로 아무도 정확한 숫자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대형 미술관의 소장품에 맞먹는 양의 작품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바로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미술 공간 중 하나가 바로 이곳이라고 가정해보자.(229쪽)

현대미술은 일종의 층 혹은 프록시로서, 사람들이 충격 정책의 효과, 충격과 공포 작전, 리얼리티 쇼, 대량 삭감, 여타 형태의 컷, 고양이 움짤, 최루탄으로 휘청거릴 때에도 아직 괜찮은 척을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충격과 혼란, 영구적으로 과민한 우울증을 일으킴으로써 감각 기관과 어쩌면 인간 이성과 이해의 영역까지 완전히 해체하고 다시 쓴다. 당신 역시 자유무역항 창고 보관실의 문 뒤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모르지 않는가? 내가 말해주겠다. 시간과 공간은 거기서 박살이 나서 입자 가속기 안에서처럼 어마어마하게 작은 조각으로 재배열된다. 그 결과는 오늘날의 현대미술로 불리는, 국경 없는 새장이다.(248쪽)

미술가는, 혹은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콘텐츠 제공자는 오늘날 작품을 공급하는 일 외에도 추가적인 용역을 수없이 제공해야 한다. 그리고 이 현상은 서서히 그 어떤 작품 형식보다도 더 중요해지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와의 대화는 상영회보다 중요하고, 실시간 강연은 글보다 중요하고, 작가와의 만남은 작품을 접하는 것보다 중요하다.(266쪽)

미술 영역에서 물리적 인간 현존의 경제가 중요한 데에는 몇 가지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사람의 물리적 현존은 운송되고, 보험에 들고, 설치되어야 하는 작품의 현존보다 평균적으로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현존은 말하자면 엉덩이를 의자에 붙여주므로, 부족한 지원금에 목을 매는 문화 기관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기관은 사람들에게 표나, 심지어 입장할 권리를 판매한다. 후자는 상급 특강이나 연구회처럼 범학제적 양식 범위에 흔히 적용되며, 인맥 범주를 확대하거나 연락처를 축적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람들의 희망을 자본화한다. 요약하자면 현존은 쉽게 계량화되고 화폐화될 수 있다.(267쪽)


차례

들어가며
서문 /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

자유낙하 — 수직 원근법에 대한 사고 실험
가난한 이미지를 변호하며
당신이나 나 같은 어떤 것
미술관은 공장인가
항의의 발화
미술의 정치학 — 현대미술과 포스트 민주주의로의 이행
미술이라는 직업 — 삶의 자율성을 위한 주장들
모든 것에서의 자유 — 프리랜서와 용병
실종자들 — 얽힘, 중첩, 발굴이라는 불확정성의 현장
지구의 스팸 — 재현에서 후퇴하기
컷! 재생산과 재조합
면세 미술
총체적 현존재의 공포 — 미술 영역에서 현존의 경제학

감사의 말
도판 목록
역자 후기


지은이

히토 슈타이얼. 영상 작가이자 저술가.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미디어 아트를 강의하며, 제11회 광주비엔날레, 제9회 베를린 비엔날레, 뉴욕현대미술관, 제56회 베니스 비엔날레, 제12회 카셀 도쿠멘타 등의 단체전 및 로스엔젤레스 현대미술관, 마드리드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 뉴욕 아티스트 스페이스, 아인트호벤 판아베 미술관 등에서 주요 개인전을 가졌다.

옮긴이

김실비. 미술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미술 이론과 조형예술을 공부하고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미디어 아트 마이스터슐러 학위를 취득했다. 주로 신자유주의적 현세의 의미를 찾는 영상 설치 작업을 하면서 서사의 구축과 위배를 반복한다. 인사미술공간, 스페이스 오뉴월,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제9회 미디어시티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리얼 DMZ 등지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편집

박활성

디자인

김형진